♬ 고전음악 작곡가 List ♬
● 프랑스 작곡가
1) 귀욤 뒤파이 (Guillaume DuFay, 1400-1474)
2) 요하네스 오케겜 (Johannes
Ockeghem, 1410-1497)
3) 오를랑드 드 라수스 (Orlande De Lassus, 1532-1594)
4)
마르크-앙토완 샤르팡티에 (Mark-Antoine Charpentier, 1643-1704)
5) 프랑수아 쿠퍼랭 (Francois
Couperin, 1668-1733)
6) 장 필립 라모 (Jean-Philippe Rameau, 1683-1754)
7) 엑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1869)
8) 프랑수아 구노 (Francois Gounod, 1818-1893)
9) 세자르 프랑크 (Cesar Franck, 1822-1890)
10) 에두아르 랄로 (Eduard Lalo,
1823-1892)
11) 카미유 생상 (Camille Saint-Saens, 1835-1921)
12) 조르쥬 비제
(George Bizet, 1838-1875)
13) 쥘 마스네 (Jules Massnet, 1842-1912)
14) 가브리엘
포레 (Gabriel Faure, 1845-1924)
15)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 1862-1918)
16) 폴 뒤카 (Paul Dukas, 1865-1935)
17) 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18)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1875-1937)
19) 프랑시스 풀랑 (Francis Poulenc,
1899-1963)
20) 올리비에 메시앙 (Olivier Messiaen, 1908-1992)
● 독일 작곡가
1)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2) 요한 다비드 하이니헨 (Johann
David Heinichen, 1683-1729)
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4)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George Fridric Handel, 1685-1759)
5)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6) 칼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
1786-1826)
7)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
8) 펠릭스 멘델스존 (Felix
Mendlssohn, 1809-1847)
9)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
10)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
11)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 1819-1880)
12)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
1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7-1949)
14) 파울 힌데미트 (Paul Hindemith, 1895-1963)
15) 칼 오르프
(Karl Orff, 1895-1982)
16) 쿠르트 바일 (Kurt Weill, 1900-1950)
● 이탈리아 작곡가
1)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
2)
조반니 가브리엘리 (Giovanni Gabrieli, 1557-1612)
3)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Claudio Monteverdi,
1567-1643)
4) 아르칸젤로 코렐리 (Arcangelo Corelli, 1653-1713)
5)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Alessandro Scarlatti, 1660-1725) &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
6)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8-1741)
7)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8) 루이지 보케리니 (Luigi Boccherini,
1743-1805)
9)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 1782-1840)
10) 조아키노 로시니
(Gioacchino Rossini, 1792-1868)
11) 가에타노 도니제티 (Gaetano Donizetti, 1797-1848)
12)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
13) 자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1924)
14) 페루치오 부조니 (Ferruccio Busoni, 1866-1924)
15) 오토리노 레스피기
(Ottorino Respighi, 1879-1936)
● 오스트리아 작곡가
1) 하인리히 이그나츠 프란츠 폰 비버 (Heinrich Ignaz Franz Von Biber, 1644-1705)
2)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
3) 요제프 하이든 (Joseph
Haydn, 1732-1809)
☞ http://www.piano.ac/lecture/하이든.htm
4)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5) 요한 슈트라우스 1세
(Johann Strauss, 1804-1849) &
요한 슈트라우스 Jr. (Johann Strauss Jr.,
1825-1899)
6) 안톤 브루크너 (Anton Bruckner, 1824-1896)
7) 후고 볼프 (Hugo Wolf,
1860-1903)
8)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9) 프란츠 레하르 (Franz
Lehar, 1870-1948)
10) 알렉산드르 쳄린스키 (Alexander Zemlinsky, 1871-1942)
11)
아르놀트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 1874-1951)
12) 안톤 베베른 (Anton Webern,
1883-1945)
13) 알반 베르크 (Alban Berg, 1885-1935)
● 러시아 작곡가
1) 알렉산드르 보로딘 (Alexander Borodin, 1833-1887)
2)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 (Modest
Mussorgsky, 1839-1881)
3)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4)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
5)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Alexandre Scriabin, 1872-1915)
6)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v, 1873-1943)
7)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1882-1971)
8)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9)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imitri
Schostakovich, 1906-1975)
● 영국 작곡가
1) 헨리 퍼셀 (Henry Purcell, 1659-1695)
2)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1857-1934)
3) 구스타브 홀스트 (Gustav Holst, 1874-1934)
4) 윌리엄 월튼 (William Walton,
1902-1983)
5)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 미국 작곡가
1) 찰스 아이브스 (Charles Ives, 1874-1954)
2) 에리히 코른골트 (Erich Korngold,
1897-1957)
3) 조지 거슈인 (George Gershwin, 1898-1937)
4) 아론 코플랜드 (Aaron
Copland, 1900-1990)
5)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1918-1990)
● 헝가리 작곡가
1)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2) 벨라 바르토크 (Bela Bartok, 1881-1945)
3) 졸탄 코다이 (Zoltan Kodaly, 1882-1967)
4) 괴르기 리게티 (Gyorgy Ligeti, 1923-)
● 폴란드작곡가
1) 프레데리크 쇼팽 (Frederic Chopin, 1810-1849)
2)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Witold
Lutoslawski, 1913-1994)
3)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 (Krzystof Penderecki, 1933-)
● 체코 작곡가
1) 안토닌 드보르자크 (Antonin Dvorak, 1841-1904)
2) 베드리히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1884)
3) 레오슈 야나체크 (Leos Janacek, 1854-1928)
● 스페인 작곡가
1) 마누엘 데 화야 (Manuel De Falla, 1876-1946)
2) 호아킨 로드리고 (Joaquin Rodrigo,
1901-)
● 노르웨이 작곡가
1)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 스위스 작곡가
1) 아르튀르 오네게르 (Arthur honegger, 1892-1955)
● 핀란드 작곡가
1) 얀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1865-1957)
● 브라질 작곡가
1) 에이토르 빌라-로보스 (Heitor Villa-Lobos, 1887-1959)
● 한국 작곡가
1) 윤이상 (I-Sang, Yun, 1917-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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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작곡가
1. 귀욤 뒤파이 (Guillaume DuFay, 1400-1474, 프랑스)
뒤파이는 1400년경 캉브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 음악사에 큰 줄기를 형성한 플랑드르 학파의 중심인물로 그의 음악적 성과는 뒤를 이은 오케겜, 조스캥
데 프레, 오를랑드 드 라수스에서 팔레스트리나에까지 미쳤다. 뒤파이는 1423년 볼로냐에서 성직자에 임명되었고, 이어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1434년부터 1439년까지는 로마를 떠나 사부아 공작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플로렌스와 볼로냐 교회의 교황
성가대에서 일했다. 1440년에 뒤파이는 캉브라에 돌아와서 (1450년부터 58년까지 다시 사부아 공작을 섬긴 것을 제외하면)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말년의 그는 미사곡 <아름답다 하늘의 여왕>을 완성하는데 매달렸으며 이 곡은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474년에 연주되었다. 그가 남긴 곡은 미사곡, 마니피카트, 모테트, 프랑스어와 이탈리어로 된 샹송 등 200여곡에 이른다. 이 곡들은
플랑드르 학파의 모방양식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며 15세기 중엽 폴리포니 양식을 싹트게 한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추천 음반>
*세속음악집 - 런던 중세 앙상블/ 데이비스 - Decca 452557
*성 안토니를 위한 미사 - 포메리움 - Archiv
447772
2. 요하네스 오케겜 (Johannes Ockeghem, 1410-1497, 플랑드르)
뒤파이, 조스캥 데 프레와 함께
프랑스-플랑드르 학파의 폴리포니를 확립한 대표적 인물. 플랑드르 지방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샤를르 7세와 루이 11, 샤를르 8세의 프랑스
궁정에서 궁정악장으로 명예롭게 보냈다. 이에 더해 앤트워프의 노트르담 성가대, 샤를르 1세 교회 등에서 명성이 자자한 가수였고, 종내엔 왕립
교회의 가수로 평생을 보냈다. 1463년엔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다. 1497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 조스캥 데 프레나
당대의 시인 기욤 크레탱 등이 수많은 애도의 시를 헌정했다. 오케겜의 작품들은 당시의 선율적이면서도 비대칭적 폴리포니를 보여주는 지침이 되었다.
특히 <레퀴엠>을 비롯하여 <미사 쿠이스비스> <미사 프롤라티오눔> <미사 플뤼 앙 플뤼> 등의
미사곡은 당대의 음악가들 뿐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추천 음반>
* 레퀴엠 - 앙상블 오르가눔/ 페레스 - HM HMC 901442
* 미사 <플뤼 앙
플뤼> - 오를란도 콘소트 - Archiv 453419
3. 오를랑드 드 라수스 (Orlande De Lassus, 1532-1594, 프랑스)
16세기 프랑스-플랑드르 학파의
중심적인 인물 라수스는 몽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소년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타고난 미성이 너무나 훌륭한 바람에 세 번이나 납치를 당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탈리아로 떠나 밀라노, 팔레르모, 나폴리 등에서 활약한 후 1553년에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의 악장이 되었다. 다시
앤트워프 등을 거쳐 1556년엔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5세의 궁정예배당에 초청되었고 1564년부터는 악장이 되어 평생을 그 직에 있었다. 그의
명성은 그가 수많은 궁정에 초대되고 훈장을 받았다는데서 입증된다. 당시의 교황 고레고리 13세는 그에게 황금박차기사장을 수여한 바 있다. 특히
남독일과 베네치아에서 라수스의 영향력은 실로 커서 레히너, 아이힝거, 가브리엘리 등의 인재가 그에게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날 남아있는
곡만도 2천곡이 넘는 라수스의 작품들은 당시의 전 장르에 걸쳐있지만 특히 모테트, 미사곡 등의 종교곡에서 탁월했다. 세속 모테트에서도 라수스의
가치는 두드러졌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등 다양한 언어와 양식으로 그 시대의 음악을 주도했다.
<추천 음반>
*성 베드로의 눈물 - 앙상블 보칼 유로팽/ 헤르베헤 HM 901483
*모테트, 미사곡집 -
탈리스 스콜라스/ 필립스 Gimell 018
4. 마르크-앙토완 샤르팡티에 (Mark-Antoine Charpentier, 1643-1704,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샤르팡티에는 로마로 유학하여 당대의 거장인 자코모 카리시미에게 음악을 배웠다. 파리로 돌아왔으나 당시 파리 음악계를 움직이던 륄리의 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1673년, 극작가 몰리에르 극단과 함께 발레극 <상상으로 아픈 남자>를 초연하면서 비로소 작곡자가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1693년에는 대작 오페라 <메데>를 초연했으나 당시로선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샤르팡티에는 기악곡, 세속 칸타타,
희유곡도 작곡했지만 그의 이름을 드러나게 한 것은 역시 종교음악 분야에서였다. 그는 클레몽 대학의 음악 교수를 거쳐 파리 제수이트 교회의 악장이
되었으며, 1698년부터 생 샤펠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11개의 미사곡, 54개의 <테네브르>, 37개의
<안티폰>, 84개의 <시편창>, 207개의 모테트와 4개의 <테 데움> 등을 통해 그는 17세기 프랑스 음악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61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명성은 지속되었다.
<추천 음반>
*성 금요일을 위한 테네브르 - 레즈네, 멜론, 일 세미나리오 무지칼레 - Virgin 59295
*<메데> - 헌트, 델레트르, 레자르 플로리상/ 크리스티 - Erato 96558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 - 콩세르
스피리튀엘/ 니케 - Naxos 553174
5. 프랑수아 쿠퍼랭 (Francois Couperin, 1668-1733, 프랑스)
바흐 가계와 마찬가지로 쿠퍼랭 가계
역시 16세기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파리 음악계를 이끈 음악가 집안이었다. 그 중에서도 프랑수아 쿠퍼랭이 가장 유명하며, 같은 이름을 가진
숙부와 구별하기 위해 '대 쿠퍼랭'이라 부르기도 한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생 제르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1690년에 최초의
작품인 <2개의 미사에 의한 오르간곡집>을 발표했으며, 1693년엔 토믈리엥의 뒤를 이어 왕립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게 되었다.
또한 클라브생 주자로도 명성을 얻은 그는 부르고뉴 공을 비롯하여 많은 왕자와 공주에게 클라브생을 가르쳤으며 <클라브생 주법>이라는
책도 저술하여 18세기 건반음악에 크게 공헌했다. <제 3일의 전례독송>을 비롯한 모테트, 테네브라이 등의 종교음악을 꽤 작곡했지만,
무엇보다 큰 그의 업적은 오르간과 클라브생 음악에 있었다. 특히 4권으로 이루어진 220여곡의 클라브생 음악은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중요한
줄기를 형성했다.
<추천 음반>
*왕실 합주곡집 - 쿠이켄 형제(플루트, 바이올린, 베이스 비올), 하인스(오보에), 코넨(하프시코드) -
Sony SB2K 60714
*성 3일의 전례독송 - 델러(카운터 테너), 토드(테너), 페룰리(비올라 다 감바), 샤퓌(오르간) -
HMA 190210
*클라브생 작품집 - 셈페 - DHM77219
6. 장 필립 라모 (Jean-Philippe Rameau, 1683-1754, 프랑스)
베를리오즈 이전의 프랑스 작곡가
중에서 가장 혁명적이었던 사람을 찾으라면 라모를 들어야 할 것이다. 라모는 비발디, 바흐, 헨델과 동시대인 18세기 전반 프랑스 고전음악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관현악의 사용법에 있어선 견줄 데가 없는 사람이었던 그는 당시 음악의 많은 부분을 혁신했다. 계몽주의의 유명한 논쟁 '부퐁
논쟁'에서도 선두에 서서 루소 등의 백과전서파와 설전을 계속했던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세 속에서 프랑스 오페라를 지켜낸 중요한 인물이었다.
작곡가였고, 비평가이자 저술가였으며, 오르가니스이기도 했던 라모는 디종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음악가의 뜻을 품고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곧
프랑스로 되돌아와서 그 후 약 20년간 프랑스 각지의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했다. 1706년 파리에서 출판한 그의 첫 작품집인 <클라브생
작품집 1권>은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1722년엔 <화성론>을 쓰면서 음악 이론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부유한 세무관이자 음악애호가인 르 리세 드 라 푸플리니에르의 후원으로 오페라 작곡에 착수한 그는 1733년에 첫 작품으로
<이폴리트와 아리시>라는 서정비극을 발표했다. 2년 후 오페라 발레곡 <우아한 인도>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뿐
아니라 65곡에 이르는 클라브생 작품에서도 라모의 가치는 두드러진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드뷔시를 비롯한 근대 음악가들이
다시 가치를 드러낸 이후 현재에는 활발히 복원되고 있다.
<추천 음반>
* 클라브생 작품집 - 루세(클라브생) Oiseaux Lire 425886
7. 엑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1869, 프랑스)
베를리오즈는 원래 약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1826년에 가가스로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그의 낭만적 상상력은 괴테와 베토벤과 셰익스피어의 세계와 조우하면서 불타올랐다. 1830년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환상교향곡>을 초연했다. 이 교향곡으로 그는 당대의 가장
혁명적이고 낭만적인 작곡가로 떠올랐다. 영국 배우인 해리에트 스미슨과 베를리오즈간의 격렬한 사랑은 유명하다. 이후 둘은 결혼해서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작곡으로 생계를 꾸리기엔 어려움을 느꼈던 그는 비평가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탈리아의 헤롤드> <파우스트의
형벌> <트로이 사람들>같은 거대한 작품으로 전 유럽을 여행하였으나,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1850년엔 <필하모닉
협회>를 결성하여 혁명 후의 파리에서 적극적인 음악활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평생을 통해 외롭게 싸워온 그는
1869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환상교향곡 - 1)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 가디너 Philips 434402,
2) 프랑스
방송교향악단/ 비첨 - EMI 64032
*파우스트의 형벌 - 1) 런던 심포니/ 데이비스 Philips 416395,
2)
시카고 심포니/ 솔티 Decca 414680
*레퀴엠 - 1) 뮌슈 - RCA ,
2) 아틀랜타 심포니/ 쇼 - Telarc
80109
*<로미오와 줄리엣> - 1) 베를린필/ 레바인 - DG 427665,
2) 몬트리올 심포니/ 뒤투아
-Decca 417302
8. 프랑수아 구노 (Francois Gounod, 1818-1893, 프랑스)
구노는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예술적 기초 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받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작곡가 라이하에게 음악 개인교습을 받았고 183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 후, 칸타타 <페르낭>으로 로마 대상을 받았다. 멘델스존이 있던 라이프치히로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며 성직자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음악가로 남기 위해 포기했다. 그 후 만든 일련의 오페라물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러다가
1859년 오페라사의 걸작 <파우스트>를 내놓아 빛을 보았으며, 1867년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오페라물들은 프랑스적 우아함과 서정성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이후 비제, 마스네, 포레 등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마치
리스트처럼 평생동안 종교적 감정과 세속적 감정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했던 구노가 <성 세실리아 축일을 위한 장엄 미사>와 같은 교회
음악을 남긴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오페라의 성공에 가려 그가 남긴 교회음악은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추천 음반>
*<파우스트> - 1) 스투더, 햄슨, 툴루즈 카피톨 오케스트라/ 플라송 - EMI 54228,
2) 데 로스앙헬레스, 겟다, 파리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클뤼탕스 EMI 65256
* <로미오와 줄리엣> - 1)
크라우스, 툴루즈 카피톨 오케스트라/ 플라송 - EMI 473658,
2) 알라냐(테너) - EMI
9. 세자르 프랑크 (Cesar Franck, 1822-1890)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운 프랑크는
12세의 나이로 리에주 음악원을 졸업하고 연주여행을 다녔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다. 15세 되던 해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푸가, 대위법,
작곡, 오르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오르간 연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던 그는 여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다가 1858년에 성
클로틸드 교회의 합창장이 된 그는 이어 그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이 즈음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리스트는 프랑크를 두고 "바흐 이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프랑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망과 존경을 받았다. 1872년엔
파리 음악원의오르간 교수가 되어 루이 비에른, 가브리엘 피에르네, 에르네스트 쇼송, 앙리 뒤파르, 뱅상 댕디 등을 가르쳤으며,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의 일원으로 프랑스 작곡가들을 지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베토벤과 바그너풍의 풍부한 화음들로 가득차 있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D단조>, 피아노곡 <전주곡, 코랄과 푸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등이
대표적이다.
<추천 음반>
*교향적 변주곡 - 1)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빌렘 반 오텔로 - Philips 442296,
2) 커즌(피아노), 런던 필/ 볼트 Decca 433628
*교향곡 d단조 - 1) 프랑스 방송 교향악단/ 비첨 - EMI
63396,
2) 시카고 심포니/ 몽퇴 BMG 86805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 1) 크레머(바이올린),
마이젠베르크(피아노) - Praga 250024,
2) 김지연(바이올린), 에구치(피아노) - Denon 78954
<참조 Site>
- http://www.classical.net/music/comp.lst/franck.html
10. 에두아르 랄로 (Eduard Lalo, 1823-1892, 프랑스)
작곡가로서 랄로의 지명도는 가장 성공적이고
개성적인 세 개의 작품 즉, 협주곡 <스페인 교향곡>, 오페라 <이스의 왕>, 발레음악 <나무나>에 기인한다.
다른 직업을 가지기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일찍부터 음악에 심취한 랄로는 결국 고향 리유를 떠나 파리 음악원에 입학, 하베네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틈틈히 작곡을 배워 첫 작품으로 두개의 트리오를 선보였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자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콘트랄토로
활약하던 성악가와 결혼하면서 다시 창작에 힘을 쏟았고 실러의 대본에 기초한 오페라 <피에스크>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이후 가곡 <오바드>(1872)와 <바이올린 협주곡 F장조>(1874)로 점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마침내 1875년 <스페인 교향곡>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의 연주는 스페인 출신의 대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사라사테가 바이올린을
맡아 더욱 화제가 되었다 계속해서 1882년에 파리 오페라단에서 발레음악 <나무로>를 선보였고, 1888년엔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매혹적인 민속 선율로 가득찬 오페라 <이스의 왕>을 올려 절찬을 받았다. 랄로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죽었지만 스페인 혈통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간직한 혈통을 음악을 통해 채색했고 이것이 그에게 성공을 안겨다 주었다.
<추천 음반>
*스페인 교향곡 - 장영주(바이올린),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뒤투아 - EMI 555292
*첼로 협주곡 - 푸르니에(첼로), 라무뢰 오케스트라/ 마르티농 DG 437371
11. 카미유 생상 (Camille Saint-Saens, 1835-1921, 프랑스)
태어난 지 몇 달만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생상은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숙모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3세부터 피아노를 배워 5세때 첫 피아노곡을 작곡해낼 정도로 음악적
자질이 출중했던 그는 10세에 샬 플레이엘홀에서 정식으로 데뷔 무대를 펼쳤다. 1848년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오르간을 배웠다.
1853년에 첫 교향곡과 미사를 작곡해서 구노,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에게 절찬을 받았다. 1861년부터 5년간 니데르 메이에르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당시 그의 제자로는 메사제, 포레 등이 있었다. 1871년엔 프랑스 작곡가들의 신작발표를 독려하기 위해 국민음악협회를 설립한 바 있다.
1888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부터 오랜 시간을 여행으로 보냈다. 알제리와 이집트 여행은 그의 작품에서 <알제리 모음곡>이나 피아노
협주곡 5번 <이집트풍>으로 표출되었다.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박학다식했던 그는 륄리, 샤르팡티에, 라모 등의 악보를 재발굴하기도
했으며, 고대 로마 악기에 관한 출판도 하고, 시와 연극에 관한 책도 펴낸 바 있다. 그가 남긴 대표작으로는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1869-72), 교향곡 3번 <오르간>(1886), 교향시 <죽음의 춤>(1874), 관현악곡
<동물의 사육제>(1886),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1863) 등이 있다.
<추천 음반>
*동물의 사육제 (실내악 연주) - 앙트르몽, 카자드쉬, 토르틀리에, 요요마 etc. Sony
MBK47655
*바이올린 협주곡 - 1) 정경화(바이올린), 몬트리올 심포니/ 뒤투아 - Decca 436483,
2)
샤함(바이올린), 뉴욕필/시노폴리 - DG 429786
*첼로 협주곡 1번 - 1) 푸르니에(첼로), 필하모니아/ 쥐스킨트 -
Testament SBT 1016,
2) 요요마(첼로),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 마젤 Sony MDK 46506
*피아노 협주곡
2번 - 1) 루빈슈타인(피아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오먼디 BMG 61863,
2) 치콜리니/ 파리 오케스트라/ 보도 - EMI
69443
*교향곡 3번 <오르간> - 1) 잠코치언(오르간), 보스턴 심포니/ 뮌슈 BMG 61500,
2)
프레스턴(오르간), 베를린필/레바인 - DG 419617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 1) 펄만(바이올린), 파리 오케스트라/ 마르티농
- EMI 477252,
2) 벤게로프(바이올린),이스라엘 필/ 메타 - Teldec 73266
*<삼손과 데릴라> -
1) 비커스, 고르, 파리 오페라/ 프레트르 - EMI 747895,
2) 도밍고, 마이어, 바스티유 오케스트라EMI 54470
12. 조르쥬 비제 (George Bizet, 1838-1875, 프랑스)
비제의 작품들 중에서 단 한 작품을 떠올리라면 아마
오페라 <카르멘>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1875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상연된 후 현재에 이르도록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오페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이 작품이 상연되었을 땐 "외설적이고 저속하다"는 비난에서부터 "극적으로 취약하다" "선율적으로
매말라있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아래서 4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비제는 9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아여 알레비와
구노의 가르침을 받았다. 17세에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고, 2년후인 1857년에 <클로비스와 클로틸드>로 로마 대상을 수여했다.
작곡가로서의 인기나 수입이 좋지 않았던 연유로 인해 당대엔 오히려 편곡자, 교사, 피아니스트로서 알려졌다. 1872년에 초연된 부수음악
<아를르의 여인들>을 제외하자면 평생을 통해 성공이나 찬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결국 <카르멘>의 초연마저 청중의
냉대를 받게 되자 그로부터 3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추천 음반>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 1,2번 - 1) 런던 콘소트/ 클라크 - Collins 11412,
2)
프랑스국립방송 관현악단/ 비첨 EMI 47794
*<카르멘> - 1) 베르간차, 도밍고, 런던 심포니/ 아바도 - DG
419636,
2) 미헤네스, 도밍고,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 마젤 - Erato 45207
*<진주조개잡이> - 게다,
미쇼, 파리 오페라코믹 오케스트라/데르보 - EMI 69704
13. 쥘 마스네 (Jules Massnet, 1842-1912, 프랑스)
마스네는 살아있는 동안 괄목할만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작품의 내면성이 부족하고 천박하다는 비판 또한 끊임없이 받아야했다. 그 비난 중에는 "바그너를 위한 고급 매춘부"라는 말도 있었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여러개의 오페라중 <베르테르>와 <마농>은 오늘날 오페라 무대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21명의 형제중에서 막내로 태어난 마스네는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여 1863년에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1878년엔 예술원의 최연소 회원이
되었다. 1877년 오페라 <라오르의 왕>이 성공한 데 이어 81년 브뤼셀에서 초연된 <에로디아드>와 84년의
<마농>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의 지위를 얻었다. 후반의 작품인 <르 시드> <에스클라몽드>
<타이스> <돈키호테> 등도 계속 호평을 받아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한 청중을 끌어들였다. 그의 작품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하여 기교적인 멜로디와 하모니로 낭만적인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추천 음반>
*<마농> - 코트루바스, 크라우스,툴루즈 카피톨 오케스트라/ 플라송 - EMI 749610
*<베르테르> - 크라우스, 트로이야노스, 런던 필/ 플라송 - EMI 566516
14. 가브리엘 포레 (Gabriel Faure, 1845-1924, 프랑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포레는 9세의
나이로 파리의 니데메이에르 음악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거기서 포레는 10년동안 성가와 르네상스 음악에 대해 공부했고 이 경력은 이후 그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또한 이 기간동안 생상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생상은 포레에게 베토벤,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다. 졸업 후 파리와 프로방스 등지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던 그는 1896년에 파리 마들랭 교회의 수석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마스네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 작곡과 교수가 되었고, 1905년에는 이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다. 이후 난청과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하게된 1920년까기 그 자리를 지켰다. 포레의 가장 큰 업적은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가곡의 위치를 격상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현악 4중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페넬로페> <파반느>와 같은 실내악, 관현악, 오페라,
합창곡에서도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가 1885년에 있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작곡한 <레퀴엠>은 레퀴엠 역사의 금자탑으로
남아있다. 원래 이 곡은 실내악 편성으로 출판되어 1888년 메들렌 교회에서 연주되었지만 이후 관현악 편성으로 재구성되었고 1900년 이후엔 이
편곡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추천 음반>
*레퀴엠 - 1)몽테카를로 오케스트라 /코르보 - Erato 45116,
2)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 가디너 - Philips 438149
*파반느 - 몬트리올 심포니/ 뒤투아 Decca 421440
*피아노 4중주
1번 - 1) 내쉬 앙상블 - CRD 3403,
2) 도무스 - Hyperion 66166
*바이올린 소나타 1번 - 1)
그뤼미오(바이올린), 크로슬리(피아노) - Philips 426384,
2) 김지연(바이올린),에구치(피아노) - Denon 75625
*13개의 녹턴 - 크로슬리(피아노) CRD 3406,7,
<참조 Site>
- http://w3.rz-berlin.mpg.de/cmp/faure.html
15.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 1862-1918, 프랑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별다른 음악적 영향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뷔시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졌다. 10세의 나이로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12년 동안 귀로에게 작곡을, 프랑크에게
오르간을, 뒤랑에게 화성법을 익혔다. 1884년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을 받으며 졸업한 그는 이탈리아로 유학 길에
올랐으나 이탈리아 오페라는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파리로 돌아온 드뷔시는 말라르메와 사귀면서 '화요회'라는 서클에 가입, 발레리, 루이스 등
상징파 시인들과 친해졌다. 1888년과 89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곡을 듣고 실망한 그는 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자바의 가멜란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한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드뷔시는 정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 <바다>, 피아노곡 <영상 1,2집>
<전주곡 1,2집>, 가곡집 <빌리티스의 노래> 등은 모두 '인상주의' 음악의 선봉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단언하기보다는
다채로운 표현으로 암시하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드뷔시는 일 뿐만 아니라 사랑에도 바쁜 사람이었다. 18세 때 폰 메크 부인의 딸과 사랑에
빠졌으나 어머니에게 퇴짜를 맞았고, 다시 한 유부녀와 연애하다가 다른 여인과 9년 살았고, 그 사이 또 다른 여인과 약혼했다. 마침내 또 다른
여인과 결혼했으나 이전에 함께 살던 여인이 자살을 기도했고, 또 다른 여인을 택해 아내를 떠나자 이번엔 아내가 자살을 기도했다. 이 화려한
편력은 1908년 두 번째 정식 부인인 엠마 바르닥과 결혼하면서 수그러들었다. 결국 여러가지 과도한 일로 인해 암을 얻은 그는 1918년에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교향시 <바다>, 녹턴 - 1)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불레즈 - DG 439896,
2) 보스턴 심포니/ 뮌슈 - BMG 61500
*현악 4중주 G단조 - 이탈리안 4중주단 - Philips 420894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 - 1) 그뤼미오(바이올린), 프랑세(피아노) - Philips 422389,
2) 정경화(바이올린),
루푸(피아노) DECCA 421154
*전주곡 1,2집 - 1) 미켈란젤리 - DG 413450, 427391,
2) 치머만 -
DG 435773
*피아노를 위한 영상 1,2집 - 미켈란젤리 - DG 414372
16. 폴 뒤카 (Paul Dukas, 1865-1935, 프랑스)
뒤카는 문학과 역사를 사랑하는 집안 풍토에서 자라났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뒤카에게 피아노와 음악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14세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뒤카는 드뷔시, 댕디
등과 친구로 지냈으며 푸가와 대위법 분야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1888년에는 칸타타 <벨레다>로 로마대상에 2위 입상했다. 그의
명성은 1897년 "괴테의 발라드에 의한 교향적 스케르초"라는 부제가 붙은 관현악곡 <마법사의 제자>가 초연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관현악 기법에서 그가 보여준 완벽한 음악적 기술은 드뷔시, 뒤카, 댕디, 포레 등 당대의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음악비평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파리국립음악원과 보통사법학교에선 명강의로 소문났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용시"라고 말한 발레음악
<페리>도 유명하지만 1907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아리안과 푸른 수염>은 뒤카가 남긴
최고의 대작으로 평가된다. 동시대의 작곡가 댕디는 이 곡에 대해 "바그너 이후 최고의 극장 음악"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추천 음반>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 - 베를린 필/ 레바인 DG 419617
*교향곡 C장조 -
필하모니아/ 마르케비치 - EMI 63160
17. 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1886)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등을 통해 단선성가풍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추천 음반>
*3개의 짐노페디, 6개의 그노시엔느, 오지브, 사라방드 - 1) 폰티넨(피아노) - BIS 317,
2) 바르비에(피아노) - Accord 201222
18.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1875-1937, 프랑스)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를 가진 라벨은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889년 14세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라벨은 1893년에 첫 작품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를
썼다. 한때 음악원을 떠나기도 했던 그는 1897년 돌아와 포레에게 작곡을, 제달즈에게 대위법과 관현악법을 배워 여러가지 편성으로 작품을 쓰게
되었다. 라벨은 로마대상을 목표로 계속 도전했였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당시 라벨의 로마대상 낙선 사건은 결국 음악원장의 경질로 이어져 큰
파문이 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 <물의 희롱>은 리스트의 흐름을 계승하는 새로운 피아노 서법으로 인정 받았다. 라벨은 재즈,
폭스트로트, 찰스톤 등 다양한 대중음악 양식에까지 폭넓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이국정취와 상상력과 유모어가 풍부한 그의 작품들은 독자적인
매력을 풍겼다. 1907년에 발표한 가곡집 <박물지>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계속해서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1908),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1908), <마 메르 루와>(1911),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1911),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1911), <볼레로>(1928), <피아노
협주곡>(1929-1931) 등 만년에 이르기까지 쉬지않고 명작을 쏟아냈다. 1930년엔 전쟁중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10월에 자동차 사고로 인해 뇌질환으로 폐인의
생활을 보내다가 1937년 뇌수술 실패로 사망했다.
<추천 음반>
*볼레로, 어미 거위, 스페인 광시곡 - 베를린 필/ 불레즈 DG 439859
*피아노 협주곡 -
아르헤리치(피아노), 베를린 필/ 아바도 - DG 419062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 -
런던 심포니/ 몽퇴 Decca 425956
*바이올린 소나타 - 침머만(바이올린),론퀴히(피아노) - EMI 54305
*밤의
가스파르, 물의 희롱 - 백건우(피아노) Dante PSG9123
19. 프랑시스 풀랑 (Francis Poulenc, 1899-1963, 프랑스)
클로드 로스탕은 작곡가 풀랑에 대해 "깡패와
수도승 사이에 풀랑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풀랑의 곡들에선 신비주의적 요소와 파괴적 위트가 모호한 형태로 같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풀랑은 5세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부터 현대음악 연주자로 유명한 리카르도 비네스에게 배웠다. 18세에 불과한
1917년에 <니그로 랩소디>를 작곡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그는 1919년에 <프랑스 6인조>의 일원으로 가담하고,
쾨클랭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음악계를 지배하던 바그너와 드뷔시의 영향을 걷어버리기 시작했다. 성숙기인 1932년에 작곡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선 그의 특징인 매서운 위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프랑스 멜로디의 귀재였던 풀랑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곡을 쓸 때 가장
행복해했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반주의 성악곡만도 1백곡을 넘는다. <사랑의 길> <동물시집> <짧은 짚> 등의
가곡집에는 폴 엘뤼아르, 장 아누이, 귀욤 아폴리네르, 코레트, 막스 야콥 등의 시가 매혹적인 형태로 녹아들어 있다. 또한 종교음악
<스타바트 마테르>(1950)와 오페라 <카르멜파 수녀와의 대화>(1957), <인간의 목소리>(1958)에서도
신비롭고 황홀한 멜로디의 예술을 드려놓았다. 성악곡 이외에 4개의 협주곡(오르간, 하프시코드, 피아노) 역시 풀랑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추천 음반>
*오바드, 하프시코드 협주곡, 오르간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 뒤샤블,
쿠프만, 알랭,
콜라르, 로테르담 필하모닉/ 콘론 Erato 95303
*가곡집 - 로트(소프라노), 존슨(피아노) Forlane
16730
20. 올리비에 메시앙 (Olivier Messiaen, 1908-1992, 프랑스)
영문학자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시앙은 자연스럽게 문학과 연극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첫 작품으로 피아노곡 <샬로트의 부인>을 썼을 땐 8세에
불과했다. 3년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11년동안 음악이론과 작곡기법, 오르간 등을 공부했다. 1928년 20세의 나이에 작곡한 오르간곡
<성찬식>에선 이미 카톨릭 신앙으로 충만한 음악언어와 풍부한 감각으로 결합된 작곡 양식을 선보였다. 그는 점차적으로 그리스,
인도네시아, 인도의 음악에 몰두하고, 북미, 아르헨티나, 일본 등지를 여행하면서 새의 울음 소리까지 연구하여 악보에 담았다. 1931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리의 트리니테 성당 오르간 주자로 시무했으며, 1941년부터 파리음악원 화성법 교수가 되어 불레즈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평생을 통해 고결한 성품으로 세계 음악인의 존경을 받았던 그는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1941),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길>(1944), <투랑갈릴라 교향곡>(1949),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1983) 등을
남겨놓고 1992년에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투랑갈릴라 교향곡 -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야노프스키 - BMG 09026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 - 브루너, 트리오 폰테니 Teldec 73239
*새의 카탈로그 - 우고르스키(피아노) DG 439214
● 독일 작곡가
1.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독일)
텔레만은 마그데부르크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개신교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로 독학으로 음악훈련을 했으나 12세때 작곡한 오페라 때문에 미망인 어머니에게 악기를
빼앗기고 이후 음악 공부를 금지당했다. 20세에 어머니의 바램대로 라이프치히로 서가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그와 같은 방을 쓰는 동료 하나가 그가
작곡한 곡을 하나 발견하고는 그것을 성 토마스 교회에서 연주했고, 그 결과 라이프치히 시장으로부터 매주 새로운 칸타타를 의뢰받았다.
이러써 텔레만의 특별한 음악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1704년 라이프치히의 신교회에서 오르간 주자가 되었고 이후 조라우에 있는 프롬니츠
백작 궁전에서 더 중요한 자리를 얻었으며, 아이제나흐와 프랑크푸르트 특히, 함부르크에서 실로 정력적인 음악활동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생전의 텔레만은 바흐의 명성을 능가하는 독일 음악계의 거두였다. 작품의 방대함으로 치자면 한 많은 곡을 쓰기로 유명했던 바흐나 모차르트,
슈베르트, 리스트도 그를 따를수 없을 곳이다. 그는 적어도 25편 이상의 극음악과 49편의수난곡, 18편의 종교 오라토리오, 3편의 세속
오라토리오, 1940편의 종교 칸타타, 44편의 세속 칸타타, 640편의 세속 세레나데, 송가 독창 및 합창리트, 7편의 교향곡, 600여편의
기악곡을 작곡했으며 사상 처음으로 비올라 협주곡을 쓰기도 했다. 1740년부터 55년 사이에 그는 음악 이론에 대한 저술 작업에 전념했다. 당시
그의 창작력은 다소 둔화되었으나, 74세 되던 해에 노익장을 과시하여 작품 창작을 하기도 하였고, 이것은 1767년 6월 25일 그가 86세의
나이로 함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추천 음반>
* 취주악기를 위한 협주곡 모음 - 쾰른 무지카 안티쿠아/ 괴벨 - Archiv 419633
*
식탁의 음악 - 쾰른 무지카 안티쿠아/ 괴벨 - Archiv 427619
2. 요한 다비드 하이니헨 (Johann David Heinichen, 1683-1729, 독일)
바흐, 텔레만과 동시대 인물인
하이니헨은 원래 라이프치히 대학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 학교에서 셀레와 쿠나우에게 음악을 배운 후 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전환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1710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안토니오 비발디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이후 7년간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오페라, 칸타타, 콘체르트 등의 작곡가로 주목을 받았다. 1716년 아우구스트 1세의 궁정악장으로 드레스덴 궁에 초빙되어 사망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1728년에 그가 쓴 저서 <게네랄바스 교본>은 당시에 쓰여진 가장 탁월한 작곡 교본으로 당대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견고한 테크닉에다 자유로운 음악적 감성을 함께 갖춘 사람이었으며, 닥쳐올 18세기의 고전주의를 미리 내다본 사람이기도 했다. 약
250여개의 작품들을 작곡했으나 작곡가의 생전엔 출판되지 못했다. 그 중에서 <드레스덴 협주곡> <콘체르티 그란디>
<예레미아의 탄식> 등이 현대에 와서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추천 음반>
* 드레스덴 협주곡집 - 쾰른 무지카 안티쿠아/ 괴벨 - Archiv 447092
* 예레미아의
탄식 - 쾰른 무지카 안티쿠아/ 괴벨 - Archiv 437549
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독일)
음악가 집안으로 유명한 아이제나흐
가문에서 태어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각종 악기에 대한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다. 어린 시절엔 여러 학교에서 오르간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덕에 오르간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그의 경력에 따라 세가지 중요한 시기를 형성한다. 1708년부터
1717년의 10년동안 그는 바이마르 궁정의 실내악 연주자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칸타타와 오르간 음악의 작곡에 주력했다. 바이마르를 떠나
쾨텐으로 옮긴 후 1723년까지 그 곳의 궁정악장으로 일했다. 이 기간동안 바흐는 교회음악 대신 세속 음악을 작곡하는데 힘을 쏟았다.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나 <평균율 클라비어 1권>을 비롯하여 4개의 관현악곡과 인벤션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이
기간중인 1721년에 그는 안나 막달레나 빌케와 결혼하여 6명의 아들에다 7명의 딸을 두게 되었다. 1723년에 그는 라이프치히의 가장 중요한
두 교회에서 칸토르와 음악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거기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직했다. 이 기간에 그는 <요한수난곡>
<마태수난곡> <B단조 미사> <골드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어 2권>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50대 후반부턴 인기없는 작곡가에 속했고 죽고 나선 거의 잊혀져갔다.
거의 100년쯤 지난 1829년 베를린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마태 수난곡>이 연주되면서 비로소 바흐의 음악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정력적이었던 바흐는 총 20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 중에 10명이 살아 남았는데, 그 중 4명이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1732-1795), 빌헬름 프리드만 바흐(1710-1784), 그리고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1714-1788)가 그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음악은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탄탄한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추천 음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1046-51 - 1) 쾰른 무지카 안티쿠아/ 괴벨 - Archiv
431701-2 ,
2) 타펠무지크/ 라몽 Sony S2K66289
*골드베르크 변주곡 - 1) 굴드(피아노) - Sony ,
2) 튀렉(피아노) VAI 1029
*B단조 미사 - 1) 라 프티트방드/ 레온하르트 - DHM 77040,
2)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트/ 가디너 - Archiv 415514
*마태수난곡 - 1) 라 프티트 방드/ 레온하르트 DHM,
2)
아르농쿠르 - Teldec 42509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 1)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야콥스 - HM 901630,
2)
오토 -Capriccio 60025
3) 몬테베르디 합창단/ 가디너 - Archiv 423232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 - 1) 톤 쿠퍼만(오르간) - Archiv 410999 ,
2) 보이어(오르간) Nimbus 5280
*바이올린
협주곡 - 1) 휴게트(바이올린),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쿠퍼만 - Erato 45283,
2) 고음악 아카데미/
멘츠(바이올린, 지휘) - HM 907155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 1) 밀슈타인(바이올린) - DG 423294,
2)쿠이켄(바이올린) DHM 77043
*무반주 첼로 모음곡 - 1) 빌스마(첼로) Sony S2K48047,
2)
카잘스(첼로) EMI 61027
*평균율집 피아노곡집 - 1) 쉬프(피아노) - Decca 414388,
2) 굴다(피아노) -
Philips 412794
4.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George Fridric Handel, 1685-1759, 독일)
헨델은 바흐와 같은 해에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났으나 21세때 독일을 떠나 4년동안 이탈리아에서 생활했으며, 1712년엔 영국 런던으로 옮겨 하노버 왕조의 총애를 받으며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1717년엔 국왕 조지 1세가 태임즈강 위에서 개최한 파티를 위해 <수상음악>을 작곡했고,
1719년엔 왕실 음악 아카데미라는 오페라단을 설립하여 자신의 오페라를 계속 상연했으며, 1741년 경에 이르자 그의 작품들이 유럽 전역에서
상연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1742년엔 더블린에서 그의 대표적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초연했으며, 1749년엔 조지 2세의
승전기념식을 위해 <왕궁의 불꽃놀이>를 작곡했다. 헨델은 1759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묻혔다. 헨델은 이전 시대의 유산들과 유럽 각지의 음악적 산물들을 통합하여 이를 거대한 음악세계로 정리해낸 작곡가였다. 관현악곡, 종교곡 등을
통틀어 헨델은 바흐와 쌍벽을 이루는 바로크 후기 작곡가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바흐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바흐의 가계가 전통적인 음악 가계였던 데
비해 헨델의 선대엔 음악가가 없었고, 바흐가 일생 독일을 벗어나지 않은데 비해 헨델은 유럽 각국을 돌아다닌 코스모폴리탄이었으며, 바흐가
20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은데 비해, 헨델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바흐가 경건한 신자였던데 비해, 헨델은 도박을 좋아하고 흥행에 손을 대어
일약 거부가 되는가 하면 곧 파산에 빠지는 등 생활의 기복이 심했다.
<추천 음반>
*합주 협주곡집 3번 - 1) 타펠무지크/ 라몽 Sony SK52533,
2) 뮈지시엥 드 루브르/
민코프스키 - Erato 94354
*합주 협주곡집 6번 - 1) 헨델&하이든 소사이어티/ 호그우드 - Oiseaux-Lire
436845,
2) 잉글리쉬 콘소트/ 피노크 -Archiv 410897
*오라토리오 <메시아> - 1) 런던 심포니/
데이비스 - Philips 438575,
2) 가브리엘리 콘소트/ 매크리쉬 Archiv 453464
*수상음악 - 1)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츠/ 가디너 Philips 434122,
2) 잉글리쉬 콘소트/ 피노크 Archiv 410525
*왕궁의 불꽃놀이
- 1)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츠/ 가디너 - Philips 434122,
2) 잉글리쉬 콘소트/ 피노크 Archiv 447479
5. .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
어린 시절부터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비범했다. 7세때 쾰른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했고 13세때 변주곡을 작곡하여 출판했을 정도였다. 궁정가수 출신이자 술주정꾼인 그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만들어 세상에 '팔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베토벤을 냉혹하게 훈련시켰다. 베토벤이 본의 오르가니스트로 지명된 것은
그의 나이 14세의 일이었다. 하이든의 권유에 따라 그는 1792년에 빈으로 옮겨 하이든과 살리에리의 영향하에 그의 음악 언어를 다졌다. 빈의
음악 살롱사회에서 베토벤은 피아노의 귀재로 이름을 높였다. 그의 탁월한 즉흥연주 실력은 청중들로 하여금 눈물과 흐느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동시대 음악가들과는 달리 베토벤은 그리 많은 여행을 하지 않았으며 빈을 평생의 고향으로 삼았다. 베토벤은 예술이 종교 차원이 아니라 인간
차원에서 도덕적 임무를 갖고 있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불신을 전 인류에 대한 이상향적 사랑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따라서 그가 남긴 9개의 교향곡, 16개의 현악 4중주,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수십개의 다른 주요 곡들이 모두
작곡가의 영적인 자전적 성격을 갖고 있다. 설흔 한 살이 되던 1801년부터 그는
청각장애에 시달렸고 종내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질병과 불행한 사랑이 겹쳐 그는 염세적이면서 고집불통에다 대인혐오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결국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1802년 10월 빈의
교외에서 쓴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이 시기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다시 음악적 소명의식을 불태워 거대한 작품
세계를 형성해냈다. 말년의 베토벤은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1827년, 56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2천명의 시민들이 그의 관을 따라갔다.
그는 베링묘지에 매장되었으나 1888년에 빈 중앙묘지로 이장되었다.
<추천 음반>
*교향곡 3번 <영웅> -1)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EMI 63356,
2) 빈필/
푸르트뱅글러 - Bayer Dacapo BR200
*교향곡 5번 <운명> -1) 빈필/ 클라이버 DG 447400,
2) 베를린필/ 푸르트뱅글러 - DG 27775
*교향곡 6번 <전원> -1) 빈필/ 푸르트뱅글러 EMI 63034,
2) 컬럼비아 심포니/ 발터 - Sony MYK42536
*교향곡 9번 <합창> -1)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푸르트뱅글러 - EMI CDH69801,
2)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푸르트뱅글러 Tahra 1003
*피아노 협주곡 5번 -1)
미켈란젤리(피아노), 프라하 심포니/스메타체크 - Praga PR250-021,
2) 코바체비치(피아노), 런던 심포니/ 데이비스
Philips 422482
*바이올린 협주곡 - 1)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프랑스 국립방송 오케스트라/ 클뤼탕스 -EMI 69261,
2) 하이페츠(바이올린), 보스톤 심포니/ 뮌슈 BMG 5402
*3중협주곡 - 1) 라레도(바이올린), 파르나스(첼로),
제르킨(피아노), 말보로 축제오케스트라/ 슈나이더 - Sony MPK44842,
2)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로스트로포비치(첼로),
리흐테르(피아노), 베를린필/카라얀 - EMI 64744
*현악 4중주 작품 12-16번 1) 스메타나 4중주단 - Denon
2) 이탈리아 4중주단 - Philips 426050
*피아노 트리오 7번 <대공> 1) 보자르 트리오 Philips
438948,
2)하이페츠, 포이어만, 루빈슈타인 트리오 RCA 60926
*바이올린 소나타 5번<봄>,
9번<크로이체르> - 1) 그뤼미오(바이올린), 하스킬(피아노) -Philips 422140,
2)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오보린(피아노) Philips 412255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14번<월광>, 23번<열정> -
1) 리흐테르 - Praga 22254,20254, 23254
2) 코바체비치 - EMI 54896
*<피델리오> -
루트비히, 비커스,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 69324
*<장엄미사> - 1) 잉글리시 발크 솔로이스트/ 가디너 -
Archiv 429799,
2) 유럽챔버오케스트라/ 아르농쿠르 - Teldec 74884
6. 칼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 1786-1826, 독일)
작은 극단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바이올린 주자이며, 형편없는 경영주였던 아버지에 이끌려 음악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성악가이자 배우였고, 씨 다른 형제 둘이 작곡가,
삼촌은 성악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사촌 가운데 셋이 소프라노였으며 이 중에 한 명 알로이지아 베버를 모차르트가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해 결국
그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칼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엉치뼈를 다쳐 다리를 절었다. 빈에서 유명한 음악교육가 게오르크 요제프 포글러의
제자가 되었으며, 1804년 포글러의 추천으로 브레슬라우 가극장의 악장에 취임했다. 1806년에 초산을 술로 오인하고 마신 바람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망쳐버리고 말았다. 이듬해엔 스투트가르트에서 귀족을 섬기면서 생활했고 계속해서 일정한 직업없이 살던 그는 1813년에 프라하 오페라단에
초청되어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게 되었다. 이어 1817년에는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단 지휘자로 취임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했다.
<클라리넷 5중주> <무도회의 권유> 등 낭만적인 기악곡도 좋지만 아무래도 그의 가치는 오페라 분야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탄의 사수>(1817-21) <오이리안테>(1822-23) <오베론>(1825-26)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준 대표적인 오페라였다. 베버의 오페라는 독일의 낭만주의 이념에 충실한 것으서서 베토벤의 <피델리오> 모차르트의
<요술피리> 등 전 시대의 오페라와 바그너의 <반지>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해냈다.
<추천 음반>
*클라리넷 협주곡 1번 - 마이어(클라리넷),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 블롬슈테트 - EMI 47351
*클라리넷 5중주 - 브룬너(클라리넷), 하겐 4중주단 - DG419600
*<마탄의 사수> - 야노비스, 마티스,
슈라이어, 아담,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 클라이버 DG 415432
7.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 독일)
하이든과 베토벤이 활약하던 빈에서 가난한 가정의
12번째 아이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이어 리히텐탈의 성가대 지휘자 미카엘 홀쳐에게 맡겨져 가창법,
오르간연주법, 대위법등의 전문적인 기초교육을 받았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그는 11세에 빈 궁정 소년 합창단원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살리에리의 지도 하에 본격적인 작곡과 연주의 실력을 쌓게 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는데 현악 4중주곡을 중심으로 서곡과
교회음악 등을 작곡했다. 아버지의 기대는 형과 같은 교사기 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교원 양성소를 거쳐 국민학교의 보조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1816년에 집을 나와서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베르의 집에 기거하면서 프리랜서 음악가 생활을 시작했다. 1818년 카를 에르테르하지 공작을 만나
그의 두 딸을 가르치게 되면서 약간의 수입이 생겼으나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슈베르트는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25세때부터
매독에 걸려 고생했고, 1828년 3월에 최초로 슈베르트의 작품만으로 된 공개연주회를 가졌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과 31세의 나이였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 2곡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짧고 힘들었던
기간동안 1000여곡이 넘는 곡을 남겨놓았다. 특히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겨울 나그네> <백조의
노래>를 비롯한 6백곡이 넘는 그의 가곡은 독일 가곡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 외에도 9개의 교향곡, 8개의 미사곡을 비롯하여 피아노
5중주곡 <숭어>,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 피아노곡 <방랑자 환상곡> <즉흥곡 집>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평생 병과 가난으로 비참했고, 죽은 후에도 그의 음악은 사후 100여년이 지난 후에나 제대로
대접받게 되었다. 심지어는 스크리아빈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 "슈베르트라... 피아노 앞에 앉아 놀기 좋아하는 계집아이들한테는 좋지."
<추천 음반>
*교향곡 8번<미완성> - 1) 필하모니아/ 칸텔리 - EMI 69217,
2)
빈필/ 푸르트뱅글러 - EMI 763193
*교향곡 9번<그레이트> - 1)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반트 - BMG
RD60978,
2)런던심포니/ 크립스 - Decca 425957
*피아노 5중주 <송어> - 1) 유디나(피아노),
베토벤 4중주단 - Arlecchino 37-38,
2) 커즌(피아노), 빈 8중주단 멤버Decca 4174599
8. 펠릭스 멘델스존 (Felix Mendlssohn, 1809-1847, 독일)
멘델스존은 독일 함부르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베를린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철학과 문학은 그의 젊은 시절을 따라다녔다. 그는 헤겔의 강의를 듣고 괴테와 만나 교분을 나눌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마음대로 여행하며서 쇼팽, 리스트, 오베르, 로시니, 베를리오즈 등을 만나 유럽 음악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으며 이 여행의 경험들을 살려 <핑갈의 동굴>,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4번 <이탈리아>,
5번 <종교개혁> 등을 작곡했다.
16세에 벌써 현악 8중주를 작곡한 그는 지휘자로서 더욱 유명해져서 1827년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바흐 이후 첫번째로 지휘하기도 했다. 1835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고, 7년 후엔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했다. <바이올린 협주고 작품64>, 오라토리오 <엘리아>, 49곡으로 된 피아노곡
<무언가>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셰익스피어의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 3막의 결혼식 장면에서 나오는 <결혼
행진곡>은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곡이 되었다.
<추천 음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1) 벤게로프(바이올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마주어
Teldec 90875,
2) 밀슈타인(바이올린), 필하모니아/ 바르친 - EMI 253654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 - 유럽 챔버오케스트라/ 아르농쿠르 Teldec 74882
*교향곡 3번<스코티쉬> -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블롬슈테트 Decca 433811
*교향곡 4번 <이탈리아> - 런던 심포니/ 아바도 - DG 415353
*교향곡
5번<종교개혁> - 뉴욕필/ 번스타인 - Sony SMK47592
*현악 8중주 E플랫장조 - 성 마틴 아카데미 -
Philips 420400
*피아노곡 <무언가> - 레프(피아노) Hyperion 6221
9.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 독일)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나 그의 음악적 자질이
증명된 것은 1830년 파가니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주최한 콘서트에서였다. 서점을 경영하던 아버지 아래서 많은 독서량을 쌓은 그는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가의 길을 갈 생각이었으나 이내 흥미를 잃고음악으로 옮겼다. 피아노 교사 비크의 지도 하에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1932년에 손을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그 길을 포기하고 작곡으로 전환했다. 1840년에 비크의 딸이자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와
결혼하면서 그는 안정을 얻어 작품 활동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1843년에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으나 교수로서는 별로
자질이 없었다. 그의 작곡활동은 195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해엔 그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라인강에 투신하는 사건까지 벌어졌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클라라와 그의 제자 브람스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1856년에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4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곡을 썼지만 슈만의 가치는 피아노곡과 가곡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피아노 곡으로는 <나비> <어린이
정경> <빈 사육제의 어릿광대> 등이, 가곡집으로는 <시인의 사랑> 등이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음악은
자기 도취와 음악외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며, 때로는 반어적이며 심지어 자기 조소적이기도 하다. 때문에 평론가들은 슈만을
낭만주의의
화신이라고 평한다.
<추천 음반>
*첼로 협주곡 - 1) 슈타커(첼로), 밤베르크 심포니/ 데이비스 BMG 68027,
2)
푸르니에(첼로), 스위스 로망드오케스트라/ 프릭세 - Cascavelle 2009
*피아노 협주곡 A단조 - 1)
리파티(피아노),필하모니아/ 카라얀 - EMI 69792,
2) 코바체비치(피아노), BBC심포니/데이비스 Philips 412923
*교향곡 1,2,3,4번 - 1) 드레스덴 오케스트라/ 자발리쉬 EMI 64815,
2) 뉴욕필/ 번스타인 - Sony
SMK47612
*사육제, 교향적 연습곡 - 1) 미켈란젤리(피아노) - DG 423231,
2) 체르카스키(피아노) -
Decca 433656
*시인의 사랑 - 1) 분덜리히, 기젠(피아노) - DG 449747,
2) 홀츠마이어, 쿠퍼(피아노) -
Philips 446086
10.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
바그너는 대단히 욕심이 많은 작곡가였다. 단지
음악가로 그치려 한 것이 아니라 음악과 연극, 또는 철학과 문학과 예술 일반의 모든 것을 종합한, 이른바 '총체예술'을 통해 에술적 표현을
극대화시키려고 했다. 한편의 오페라가 구상되는 그 시점으로부터 초연 무대의 막이 내릴때까지 그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미술, 조명, 대본,
의상에 이르는 모든 것에 손을 대었다. 베토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고향 라이프치히에서 잠시 대학을 다녔고, 1832년부터 교향곡 C장조와
미완의 오페라 <혼례>의 대본을 썼다. 그로부터 10년동안 이곳 저곳 옮겨다니던 그는 1842년 <리엔치>와 이듬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성공으로 드레스덴 궁정오페라단 악장이 되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극의 흐름을 강하게 연결시키기 이해 '유도
동기'란 기법을 사용했으며, 종래의 번호 오페라를 버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 <반지 사이클>(1876)
<파르지팔>(1882)에 이르러선 전통적인 오페라 양식을 완전히 떠나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바그너의 대표적인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는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드> <신들의 황혼>의 4개
오페라로 이루어져 총 14시간 30분이나 소요되는 오페라사의 초대작이다. 이 대편성의 악극은 바그너 평생의 이념이 발현된 것으로 기획에서 완성을
보기까지 실로 26년이란 세월을 요구했다. 1876년 여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의 오페라는 단지 음악계뿐 아니라 문학, 미술
등에 이르는 문화예술 전반에 유래없는 파급을 미쳤다. 음악을 떠나 인간적인 평가를 내리자면 바그너처럼 고약한 사람도 드물다. 돈과 여자를 심하게
탐했고, 결국 리스트의 딸이자 폰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를 꼬드겨 두 번째 결혼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심각한 반유태주의자, 게르만
종족주의자여서 그의 음악은 나중에 히틀러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추천 음반>
*<파르지팔> - 1) 런던, 탈베라, 호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크나퍼츠부슈
Philips 416390,
2) 호프만, 몰,반 담, 베를린 필/ 카라얀 - DG 413347
*<니벨룽겐의
반지>(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 1) 닐손, 빈트가센, 플라그슈타트,피셔-디스카우, 호터, 빈필/ 솔티 -
Decca 455555,
2) 닐손, 빈트가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뵘 - Philips 420325
*<트리스탄과 이졸데> - 1) 빈트가센, 닐손, 루트비히, 탈베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뵘 Philips
434425,
2)프라이스, 콜로, 파스벤더,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 클라이버 - DG 413315
*서곡 모음반 - 1)
베를린 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빈필/ 쿠벨릭, 카라얀, 뵘, 요훔 외 DG 439687,
2)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747254,5
11.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 1819-1880, 독일)
오펜바흐의 인생은 몹시 뒤죽박죽이었다.
제본업자이자 유태교회의 칸토르였던 아버지 아래서 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1933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서 첼로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퇴학하여 극장
소속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주자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초기엔 혼합극에서 출발하여 판토마임이나 패로디, 통속 희극의 곡을 썼다. 첼로 연주 실력이
인정을 받으면서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막간극을 쓰게 되었고, 이어 테아트르 프랑세 극장에서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천국과
지옥>으로 알려진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오>(1858)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엘렌>(1864), <파리
여인의 삶>(1866), <페리콜>(1868) 등이 계속해서 파리 시민들을 사로잡았고 그의 명성은 국외로 번져나갔다.
1860년에 그는 프랑스로 귀화하고 이듬해에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제정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그의 인기는 하강했는데, 경제적 이유로
1876년 미국을 여행한 뒤 1877년부터 '호프만 이야기'의 작곡에 착수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 곡은 귀로가 보필해서 1881년에
초연되었고 이후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에 필수적인 곡이 되었다. 오펜바흐의 음악들은 조롱과 위트가 가득차 있으면서도 신화와 전설, 정치적 비판,
초현실적 공상 등이 자유롭게 사용되었고 빈에서 주페, 요한 슈트라우스 등이 오페레타의 전성기를 이루는 데 초석으로 작용했다.
<추천 음반>
*파리의 즐거움 - 필하모니아/ 매리너 - Philips 411476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 아라이자, 린트, 스투더,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 테이트 - Philips 422374
12.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 독일)
브람스의 아버지는 함부르크의 작은 경음악단에서
일하는 가난한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다. 조숙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브람스는 선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1853년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연주여행에 나선 그는 하노버에서 요아힘을 만나 삶의 전기를 맞게 된다. 요아힘이 그에게 슈만 부부를 소개해준 것이다.
슈만 부부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브람스는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을 걷게되었다. 리페-데트몰트의 작은 궁정에서 합창 지휘자로 3년간 지내면서
피아노와 작곡 수업을 계속한 그는 1868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작곡한 <독일 레퀴엠>을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빈에
정착하게 된 브람스는 1872년부터 1875년까지 빈 악우회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1896년 평생을 두고 사모해온 클라라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점점 쇠약해져가던 브람스는 이듬해 4월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향 함부르크에선 모든 배들이 반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브람스는
표제음악이나 오페라에 심한 적대감을 가졌으며 바그너가 주도한 신독일학파에 강력히 반대했다. 고전적 전통에 입각한 낭만적 이념으로 절대음악을
구축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대담한 화성과 강렬한 표현의 면에선 급진주의자였으나, 전통 악식부터 심지어 고대 악식까지 채용하며 음악의 형식미를
견고히 하려한 점에 있어선 보수주의자였다. 그가 작곡한 많은 성악곡과 실내악곡들도 사랑받고 있지만 4개의 교향곡과 4개의 협주곡(1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2개의 피아노 협주곡, 1개의 이중협주곡)은 특히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추천 음반>
*교향곡 1,2,3,4번 - 1)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하이팅크 - Philips 442068,
2)북독일심포니/ 반트 BMG 20283
*피아노 협주곡 1,2번 - 1) 길렐스(피아노), 베를린필/ 요훔 DG 419158,
2) 아라우(피아노),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하이팅크 - Philips 438563,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 1)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프랑스 국립방송교향악단/클렘페러 - EMI 64632,
2) 하이페츠(바이올린),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
BMG 61495
*이중협주곡 - 1)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로스트로포비치(첼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셀 - EMI 64744,
2) 밀슈타인(바이올린), 피아티고르스키(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라이너 - BMG 1485
*헝가리 무곡 - 1) 런던
심포니/ 도라티 - Mercury 434326,
2) 빈 필/ 아바도 - DG 410615
*비극적 서곡, 대학축전 서곡 - 1)
보스턴 심포니/ 하이팅크 - Philips 442068,
2)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EMI 69651
*현악 6중주 1번 -
라파엘 앙상블 - Hyperion CDA 66276, 2) 스턴, 린, 마, 라레도, 로빈슨,트리 Sony S2K45820
*클라리넷
5중주 - 1) 킹(클라리넷), 가브리엘리 4중주단 - Hyperion 66107,
2) 켈(클라리넷), 부슈 4중주단 - EMI
64932
*독일 레퀴엠 - 1) 슈바르츠코프, 피셔 디스카우,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 64932,
2)헤간더, 로렌츠,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 케겔 - Eterna 29163
1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7-1949, 독일)
슈트라우스는 바바리안 궁정관현악단의 수석 호른
주자였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워 일찌감치 훌륭한 음악가들과 친분관계를 가졌고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세계는 참으로 복잡하다. 초기에는
<돈 주앙> <죽음과 변형>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교향시와 오페라 <살로메>(1905) <엘렉트라>(1909)에 보이듯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두주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엔
오페라 <살로메>(1911)에서 보이듯, 아방가르드를 떠나 바로크 음악에서 빌려온 고전적 미학으로 이동했다. 이어 그는 후기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양식을 통합한 형태로 발전하여 < 낙소스의 아리아드네>(1912-16) <그림자 없는
여인>(1919) <아라벨라>(1933) <카프리치오>(1942) 등의 오페라와
<메타모르포젠>(1946)같은 기악곡, <4개의 마지막 노래>와 같은 가곡집을 낳았다. 지휘자로서도 엄청난 대우를 받았던
그는 베를린 궁정 오페라단의 음악감독, 빈 국립오페라단 지휘자를 거쳤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창설자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정권을
잡는 동안 정치적 그물에 말려들어 전쟁이 끝나자 전법재판에 회부되는 (비록 무죄 판결이 났지만) 치욕을 겪기도 했다. 뮌헨에서 태어나 바바리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죽음이란 게 <죽음과 정화>에서 그려보던 것과 똑같군"하고 말했다.
<추천 음반>
*알프스 교향곡 - 드레스덴 국립교향악단/ 켐페 EMI 64350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의 생애 -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BMG 61494
*혼 협주곡 1번 - 브레인(혼), 필하모니아/ 자발리쉬 - EMI 747834
*4개의 마지막 노래 - 슈바르츠코프(소프라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애커만 EMI 61001
*<장미의 기사> -
슈바르츠코프, 루트비히, 에델만, 필하모니아/ 카라얀 EMI 49354
*<살로메> - 존스, 피셔-디스카우, 함부르크 오페라
오케스트라/ 뵘 - DG 445319
14. 파울 힌데미트 (Paul Hindemith, 1895-1963, 독일)
천재로 소문났던 힌데미트는 14세의 나이로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 입학해서 작곡을 공부했다. 1915년에 20세의 나이로 프랑크푸르트 오페라단의 악장이 되어 8년동안 재직했고, 이 사이에
스승인 레프너의 현악 4중주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아마르 현악 4중주단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다. 또한 작곡가로서의 길도 이 시기에
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감정이나 사상적인 주제를 배격하는 '신음악'으로 충격을 주었다. 특히 1919년에 발표한 오페라 <살인자, 여인의
욕망>이나 1922년에 초연한 <성 수잔나>같은 오페라가 그러했다. 1927년엔 베를린 국립음대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지만
1937년에 나치스의 압력으로 그 직을 사임하고서 스위스를 거쳐 1940년엔 미국으로 옮겼다.(나치는 그의 음악에 대해 '독일음악에 대한 비열한
왜곡'이라고 선동했다) 미국 시절엔 예일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연주활동보다 교육에 치중했다. 1953년 스위스로 돌아온 힌데미트는 지휘자
활동을 겸하면서 68세로 타계하기까지 작곡에 힘썼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을 중심으로 연주되고 있는 편이지만 오페라 <카르디야크>와
관현악곡 <화가 마티스> <우주의 조화>같은 그의 대표작이 현대음악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추천 음반>
*교향곡 <화가 마티스> - 1)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자발리쉬 - EMI 55230,
2)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블롬슈테트 Decca 421523
*교향곡 <우주의 조화> - 드레스덴 필하모니/ 케겔 -
Ars Vivendi 2100178,
*실내음악 1-7 -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샤이 Decca 433816
15. 칼 오르프 (Karl Orff, 1895-1982)
뮌헨에서 태어난 오르프는 5세부터 첼로, 피아노, 오르간을 배웠고,
11세때 12개의 초기가곡을 작곡해냈다.
뮌헨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후 뮌헨, 만하임, 다름슈타트 등지에서 악장을 역임했다.
고음악 연구에 흥미를 느낀 그는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바로크 작곡가들의 작품을 다수 편곡했다. 1924년에 도로테 귄터와 함께 뮌헨에 체육,
무용, 음악학교인 <귄터학교>를 설립하여 신체의 움직임과 음악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음악교육에도 열성적이었던 그는 1930년부터
35년 사이에 전 5권으로 된 <학교교육용 작품집>을 편찬했고, <어린이를 위한 음악>도 저술했다. 오르프는 1937년에
대작 <카르미나 부라나>를 완성하면서 이전의 작품들을 모두 파기해버렸다. 그래서 <학교교육용 작품집>은 1937년 이전에
작곡된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작품이 되었다. <카르미나 부라나> <카툴리 카르미나> <아프로디테의
승리>의 3부작으로 된 <승리>는 중세 라틴어와 독일어 텍스트를 통해 신을 떠나 육신을 찬미한 세속 찬가다. 단순한 화음과
고전적인 멜로디를 사용하여 극의 효과를 주었으며, 강렬하고 복잡한 리듬이 충격을 주었다. 합창과 타악기들이 원시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오르프가 열망했던 "종합극"의 이념이 그대로 반영된 곡이었으며 이로인해 그의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추천 음반>
*<카르미나 부라나> - 1) 베를린 오페라 오케스트라/ 요훔 - DG 423886,
2) 런던 심포니/ 프레빈 EMI 47411
16. 쿠르트 바일 (Kurt Weill, 1900-1950, 독일)
독일 데사우에서 태어난 바일은 베를린 음대에서 훔퍼팅크에게
작곡을 배웠으나 곧 그만두고 귀향한 후 한스 크나퍼츠부슈 아래서 일했다. 다시 베를린에서 부조니에게 작곡을 배웠고, 1922년에 <신포니아
사크라>로 무대음악을 시작했다. 이듬해 극작가 카이저와 함께 만든 오페라 <주역>이 성공을 거두었고다. 1930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만나 이룬 <마하고니>(1927)와 <세 푼짜리 오페라>로 20세기 음악사의 한 장을 엮어냈다. 그는 이들
오페라에서 트로트, 재즈, 발라드 등의 대중음악을 결합시켰으며, 강렬한 관악기와 타악기 음색으로 충격을 주었다. '알라바마의 달' 같은 곡에선
합창과 대화가 서로 교차하는 혁신적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일의 민중적인 오페라가 점점 힘을 얻어가자 이를 두려워한 나치정부는 그의 모든
악보를 수거하여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바일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이후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 등지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일하다가 195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추천 음반>
*<서푼짜리 오페라> - 콜로, 램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모체리 - Decca 430075
*<7가지 죄악> - 로스, 존슨, 버밍엄 심포니/ 래틀 - EMI 64739
● 이탈리아 작곡가
1.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 이탈리아)
11세때 고아가 된 팔레스트리나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 부속 합창학교에서 브뤼멜, 조스캥 등 프랑스-플랑드르 학파의 음악을
공부했다. 1544년부터 고향인 팔레스트리나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고 1547년에 루크레지아 고리와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1550년에
팔레스트리나의 주교인 조반니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어 율리우스 3세로 즉위했다. 그가 즉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팔레스트리나를 성 베드로 성당의 줄리아 예배당 악장으로 앉히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교황의 총애 속에 활동하게 된 팔레스트리나는
1554년에 최초의 작품집인 <미사곡집 1권>을 출판하는 등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1555년 율리우스 3세가 사망하고
반종교개혁자인 파울루스 4세가 즉위하면서 모든 결혼한 사람을 교황예배당에서 내쫒는 바람에 팔레스트리나도 교황청을 떠나야
했다. 로마 라테라노 성당 악장을 거쳐 1561년에 고향으로 되돌아온 그는 5년 동안 성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악장으로 일했다. 피우 4세
직속 교육기관인 세미나리오 로마노에서 음악을 가르친 후 다시 줄리아 성당의 합창장으로 복귀한 팔레스트리나는 이후 교황 아래서 평생토록 편안하게
음악생활을 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후반에 있어 팔레스트리나의 업적은 두드러진다. 그는 <교황 마르첼리의 미사>를 비롯하여 100개
이상의 미사곡을 남겼고, 400개에 달하는 모테트를 작곡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애가, 마니피카트, 찬가를 남겼다.
<추천 음반>
*미사곡 <Asumpta est Maria> - 탈리스 스콜라스/ 필립스 Gimmel 020
*미사곡 <Papae Marcelli> - 탈리스 스콜라스/ 필립스 Gimmel 994
2. 조반니 가브리엘리 (Giovanni Gabrieli, 1557-1612)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조카였던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1576년 뮌헨으로 간 가브리엘리는 그 곳에서 4년간 라수스가 지휘하는
궁정악단에서 활동했다. 1586년 삼촌의 후임으로 성 마르코 대성당의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직했다. 이 사실은 곧 그가
당시 베네치아 학파의 선봉장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클라우디오 메룰로의 후임으로 산 로코의 스쿠올라 그란데의
오르가니스트를 겸임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프레토리우스, 스벨링크, 슈츠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세속적인 음악도 여러 곡
작곡했으나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모테트나 미사곡같은 종교음악에 있었다. 가브리엘리가 개척한 르네상스 말기의 폴리포니 양식은 이후 바흐의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추천 음반>
*칸초네와 소나타 - 런던 코넷& 색버트 앙상블/ 패럿 Archiv 437073
*베네치아
대관식 - 가브리엘리 콘소트/ 맥크리쉬 Virgin 59006
3.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Claudio Monteverdi, 1567-1643, 이탈리아)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몬테베르디는
크레모나 성당의 악장인 마르크안토니오 인제네리에게 음악을 배웠다. 이후 비올라 연주자로 일했다. 1582년 15세때 3성 모테트집 <종교적
작은 가곡집>을 출판했고 계속해서 <종교적 마드리갈집> <3성 칸초네타> 등으로 음악계에 이름을 높여갔다. 1601년
만토바공작의 궁정악장에 임명된 그는 페리의 오페라 <유리디체>에 자극받아 <오르페오>을 완성했다.(1607) 1612년엔
만토바를 떠나게 되었고, 이듬해에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 악장으로 취임하여 이후 30년간을 봉직했다. 이 시기에 9권의 마드리갈 곡집을
비옷하여 초창기 오페라의 걸작들과 숱한 교회음악들을 작곡해냈다. 1943년 마지막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을 베네치아에서 상연한 지
한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몬테베르디는 언어가 가진 성격을 충실히 살려 그것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인물의 성격과 감정묘사도 뚜렸하게
살려 극의 드라마틱한 표현을 극대화시켰다. 사망후 약 200년간 잊혀졌던 몬테베르디의 작품들은 180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선 전세계적으로 그의 작품들이 연주되고 있다.
<추천 음반>
*<오르페오> - 1)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 아르농쿠르 - Teldec 43441,
2)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츠/ 가디너 DG 419250
*<아리아나의 탄식> -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 아르농쿠르
- Teldec 43441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 1610 - 1) 카펠라 루아얄/ 사발 - Auvidis E8719,
2)
쾰른 무지카 피아타/ 베르니우스 - DHM 77760
*마드리갈 4권, 5권 - 콘체르토 이탈리아노/ 알레산드리니 Opus111
OPS30 81
4. 아르칸젤로 코렐리 (Arcangelo Corelli, 1653-1713, 이탈리아)
코렐리는 볼로냐와 라베나 사이의 작은 도시
푸지냐노에서 태어나 파엔차에서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았다. 볼로냐로 옮겨 벤베누티, 브루놀리 등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1675년에 로마로 와서 성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 교회에서 수석 바이올린 주자 겸 지휘자, 교사로 활동했다. 로마로 온 코렐리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펼친 예술
행사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687년에는 150명의 단원들로 이루어진 음악원 소속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이로인해 캄필리 추기경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1689년 추기경에 임명된 오토보니는 그를 문예원 소속 악단의 지휘자 겸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했으며, 이 때부터 코렐리는 로마의
가장 권위있는 음악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교사로서 코렐리의 명성은 곧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고 이어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소나타, 협주곡,
콘체르토 그로소를 망라한 그의 작품은 각 12곡씩 담은 6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남긴 12곡의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집은 독주 소나타의 새 장을 열었다. 특히 12번 <라 폴리아>는 유명하다. 또한 그가 죽은 후 출판된 <콘체르토
그로소집 작품6>은 그의 <트리오 소나타집>과 함께 17세기 기악 음악의 한 획을 긋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뒤이어 나타나는
바흐, 스카를라티, 헨델 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추천 음반>
*콘체르토 그로소 작품6 - 1) 잉글리쉬 콘소트/ 피노크 - Archiv 423626, 2) 앙상블
415/ 반키니 - HMU 1406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라 폴리아> - 트리오 소네리 - Virgin 908402
*트리오 소나타 - 오로라 앙상블 - Tactus 65030101-2
5.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Alessandro Scarlatti, 1660-1725) &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Domenico Scarlatti, 1685-1757, 이탈리아)
시실리에서 태어난 알레산드로는 1672년에 로마의 친지집에서 맡겨져
거기서 합창단원 등을 하며 음악에 대한 눈을 키웠다. 1679년 <꼭 닮은 사람>을 무대에 올려 일찌감치 성공 가도를 달렸다.
1684년 나폴리 총독의 교회 악장이 되었고 거기서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더했다. 다시 로마로 와서 오토보니 추기경의 지원 아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의 악장으로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해 다시 나폴리로 돌아갔다. 나폴리에서 궁정악장으로 있으면서 오페라의
개선에 혁혁한 공을 세워 이후 레오, 빈치, 하세 등 나폴리 악파를 일구어내는 반석이 되었다. 알레산드로의 6번째 아들인 도메니코는 아버지의
음악적 자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1719년 리스본 대사교좌 교회의 악장을 거쳐, 1728년부터 스페인 궁정 음악가로 일생을 보냈다. 아버지가
오페라나 칸타타 분야에서 공헌한 것만큼이나 큰 업적을 그는 하프시코드 음악에서 취득했다. 총 550여곡을 헤아리는 그의 하프시코드 소나타들은
원래 포르투갈과 스페인 궁정에 있으면서 교육과 연주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당대 소나타 양식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추천 음반>
*키보드 소나타 - 1) 호로비츠(피아노) - Sony SK53460,
2) 페라이어(피아노)
Sony SK
*스타바트 마테르 -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츠/ 가디너 Erato 45219
6.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8-1741,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안토니오 비발디는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고 독창인 이탈리아 작곡가로 바로크 협주곡 양식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뛰어난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했던 그의 재능은 역시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의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로부터 배운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그는 1703년에
사제로 임명됐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선 드물게 머리카락이 붉어 '붉은 머리 사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같은 해에 그는 베니스의 피에타 여자 양육원에서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다. 1705년에 12개의 트리오 소나타(작품1)을 완성한 그는
1709년엔 바이올린 소나타(작품2)를 덴마크 왕에게 헌정 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협주곡도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4년후인
1713년 피에타 음악원의 음악 감독이던 가스파리니가 병으로 그 직책을 그만두게 되면서 비발디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음악원을 위해
종교 음악을 작곡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미사곡, 오라토리오, 모테트 등이 들어있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기악곡들을 계속 내놓음으로써 비발디의
명성은 날로 치솟아 갔다. 1723년, 그는 피에타 음악원으로 부터 매달 2개의 협주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 받는다. 1725년에 완성된
<'화성과 창의의 시도>는 보헤미아 공작에게 헌정됐는데, 이 작품 속에 그 유명한
<사계>가 포함돼 있었다. 사제가
되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했던 비발디는 공직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고 의도적으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사이의 장벽을 부서며 넘나들었다. 대중 연주회를
열어 여러 가지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알토 가수 안나 지로와의 관계도 그러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발디의 제자였던 그녀는
1724년부터 1747년까지 베니스의 오페라 공연에 정기적으로 출연해왔다. 사제였던 비발디는 당연히 주위의 쏙덕거림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고향을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던 비발디는 빈에서 63세의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추천 음반>
*조화의 영감 - 1) 잉글리쉬 콘소트/ 피노크 - Archiv 423094,
2) 유로파 갈란테/
파비오 비욘디 Virgin 45315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 1) 유로파 갈란테/ 파비오 비욘디 - Opus111
9120,
2) 자르디노 아르모니코 앙상블/안토니니 - Teldec 97208
*만돌린 협주곡 - 갈페티(만돌린), 자르디노
아르모니코 앙상블/ 안토니니 - Teldec 91182
*플루트 협주곡 작품10 - Teldec 73267
*<글로리아> - 1) 고음악 아카데미/ 프레스톤 - Oiseau-Lire 414678,
2) 콜레기움 무지쿰 90/
히콕스 Chandos 0518
7.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이탈리아)
비록 26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렸지만 페르골레지는 스카를라티를 잇는 초기 나폴리 악파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을 이끌고 바이올린을 배운 페르골레지는 나폴리에서 대위법을 배웠고, 두란테에게 작곡을 배웠다. 1731년에 나폴리의 성 안젤로 마조레 교회에서
종교극 <아퀴타니아의 성 굴리엘모 개종의 기적>을 상연하여 작곡가로 데뷔했다. 이듬해에 스틸리아노 공의 악장이 되었고 1973년엔
로마의 마달로니 공의 악장이
되었다. 1931년엔 첫 오페라 세리아 <살루스티아>를 작곡한 이후 <연애하는
수도사>(1732), <콧대높은 죄수>(1733)를 작곡했고 1733년 <마님이 된 하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고, 1752년 파리 상연 시에도 오페라 부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이
작품은 모차르트, 치마로사, 파이지엘로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돌아간 페르골레지는 왕립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게
되었으나 결핵에 걸려 1736년에 포주올리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완성한 작품이 또 하나의 걸작
<슬픔의 성모>였다.
<추천 음반>
*스타바트 마테르 - 1) 클레망식 콘소트/ 클레망식 - Accord 200062
*살바 레지나 -
유로파 갈란테/ 비욘디 Opus111 OPS30-88
8. 루이지 보케리니 (Luigi Boccherini, 1743-1805, 이탈리아)
첼로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첼로를 배운 보케리니는 로마에서 공부를 한 후 13세의 나이로 데뷔무대를 가진 천재였다. 이후 빈으로 옮겨 음악적 테크닉을 넓힌 보케리니는
21세 되던 해 고향인 루카의 팔라틴 성당 수석 첼리스트로 임명되었다. 4중주단으로, 듀오로, 전 유럽을 여행하였으며, 바이올리니스트인 필리포
만프레디와 함께 파리 리사이틀을 가져 인기를 누렸다. 파리 리사이틀에서 스페인 대사의 눈에 뜨인 보케리니는 스페인 궁정으로 초빙되어
궁정악사로서의 삶을 누렸다. 그러나 말년의 그는 계속된 가족의 죽음과 경제적 곤궁 속에서 쓸쓸히 지내다가 죽음을 맞았다. 보케리니는 교향곡과
협주곡도 상당수 작곡했지만 실내악곡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대부분 탄력적인 리듬과 매력적인 멜로디로 음악의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곡들이다.
<추천 음반>
*첼로 협주곡 B플랫장조 - 1) 코앙(첼로), 리모주 바로크 앙상블 - Auvidis E8517,
2) 요요마(첼로), 성폴 챔버오케스트라/ 주커만 - Sony MK39964
*기타 오중주 1-7번 - 사비노(기타), 아타리아
4중주단 - HMU 907039, 907026, 907069
* 첼로 소나타집 - 빌스마 (첼로), 반 아스페렌(하프시코드) - Sony
SK53362
9.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 1782-1840, 이탈리아)
제노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파가니니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폭압적인 음악교육을 받아야 했다. 5세때부터 만돌린을 잡은 그는 2년 후 바이올린으로 바꾸고서 하루종일 연습을 해야했다.
1795년 13세의 파가니니는 파르마로 가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이름높던 알레산드로 롤라에게 지도를 청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생각한 롤라는 대신 페르디난도 파에르에게 작곡을 배우도록 했다. 이듬해 제노바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로카텔리가 1733년에 출판한
악보집 <비올리노의 기법>에서 <24개의 카프리스>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은 이후 그가 <24개의
카프리스>를 작곡하는 동기가 되었다. 1801년부터 1809년까지 루카에서 작곡, 교육, 연주등으로 세월을 보낸 후, 파가니니는 프리랜서
연주자로 이탈리아 전역에 연주 여행을 다녔다. 1813년 파가니니는 밀라노 라 스칼라 연주회를 위해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곡 <마녀들의
춤>을 작곡했다. 이 곡은 이후 <24개의 카프리스>와 함께 그의 무대에서 가장 각광받는 곡이 되었다. 1828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던 파가니니는 40대 후반에 들어서야 외국으로 진출했다. 비록 늦은 나이였지만 파가니니의 등장은 유럽 전역에 파란을 몰고 왔다. 음악가,
작곡가, 비평가, 공연기획자 할 것 없이 파가니니의 현란한 연주에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는 정부의 애인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있는 동안
악마에게 기법을 전수받았다는 풍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청년 쇼팽은 1829년 바르샤바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 <파가니니의 추억>이라는
소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834년부턴 인기가 급속도로 하강하여 결국 쓸쓸히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1840년에 세상을 떠났다. 교회 장례식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5년 동안이나 자리를 찾지못하고 떠돌아야 했다. 그의 죽음은 근대 바이올린 비르투오조 역사의 종말이나 다름없었다.
<추천 음반>
*24개의 카프리스 - 1) 라빈(바이올린) - EMI 64560,
2) 아카르도(바이올린) DG
429714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1) 펄만(바이올린), 로열 필하모닉/ 포스터 - EMI 47101,
2)
장영주(바이올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자발리쉬 - EMI 55026
*기타와 바이올린 소나타집 - 1) 비안키(바이올린),
프레다(기타) - Dynamic CDS34,84,
2) 샤함(바이올린), 쇨셔(기타) DG 437837
10. 조아키노 로시니 (Gioacchino Rossini, 1792-1868, 페자로)
로시니는 도니제티, 벨리니와 더불어
19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벨칸토 낭만주의의 빛나는 예술성을 꽃피웠다. 그리고 멜로디의 구성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천재성을 선보였다. 페자로에서 관악주자인 아버지와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테어난 로시니는 불과 14살의
나이로 첫번째 오페라 <테메트리오와 폴리비오>를 작곡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810년에 단막의 오페라 부파인 <결혼
보증서>를 완성하여 베니스에서 초연했다. 이 곡의 성곡으로 그는 단숨에 유명 오페라 작곡가로 등장했다. 이 때부터 시작하여 37세 되던
1829년까지의 20년 동안 그는 수많은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엄청난 다작가였던 로시니는 1812년 한 해동안만도 <행복한
착각>, <바빌로니아의 키로스, 또는 벨사자르의 몰락>, <비단 사다리>, <시금석>, <도둑의
찬스> 등을 작곡해냈다. 24세때 쓴 그의 대표작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단 13일만에 작곡되었다고 한다. 1813년에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등을 쓰면서 롯시니의 명성은 이탈리아를 벗어나 유럽 대륙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1817년에는 <신데렐라> <도둑까치>가, 1918년엔 <이집트의 모세>가, 1919년엔 <호수의
여인>가 줄을 이어 쏟아져 나왔다. 그 대부분은 오페라 부파였으나 <호수의 여인>과 <세미라미데>같은 오페라 세리아도
있었다.
1825년의 <랭스 여행>, 1826년의 <코린트의 포위>, 1827년의 <모세와 파라오>,
1828년의 <오리 백작>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이어갔던 롯시니는 1829년에 <윌리엄 텔>을 완성한 후 갑자기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었다. 따라서 불과 37살의 나이에 완성한 <윌리엄 텔>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처럼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게된 이유에 대해 롯시니는 오페라 작곡 보다 먹는 일이 더욱 즐겁기 때문이라는 식의 농담을 즐겼는데, 실제로 중단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작품을 노래할 성악가가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의 오페라는 부인이었던 이사벨라 콜브란을 비롯하여, 안드레아 노자리, 조반니 다비드 등
당대의 주요 성악가에 맞춰 작곡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벨칸토 창법을 익힌 성악가들이었으나,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과 성악가들이 벨칸토
창법을 멀리하게 되었기에, 결국 롯시니는 오페라 무대를 떠나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추천 음반>
*서곡집 - 1)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 노링턴 EMI 54091,
2) NBC 심포니/
토스카니니 - BMG GD60289
*<세빌리아의 이발사> - 1) 데 로스 앙헬레스, 알바, 로열 필하모닉/ 구이 EMI
64162,
2) 알렌, 발차, 아라이자, 성마틴 아카데미/ 매리너 - Philips 411058
*<신데렐라> -
1) 발차, 아라이자, 성 마틴 아카데미/ 매리너 - Philips 420468,
2) 바르톨리, 마테우치, 볼로냐 테아트로 코뮤날레/
샤이 Decca 436902
*스타바트 마테르 - 1)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프리차이 - DG 439684,
2) 빈 필/ 정명훈
- DG 449178 런던 신포니아/ 히콕스 Chandos 8780
11. 가에타노 도니제티 (Gaetano Donizetti, 1797-1848, 이탈리아)
로시니, 벨리리니와 함께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 일찍부터 작곡에 재능을 나타냈으나 교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명령과 싸우다가 군에 자원 입대해버렸다. 군에서
작곡한 오페라 <보르고냐의 엔리코>가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오페라들이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1830년 이르러 <안나 볼레나>가 성공하면서 비로소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전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상연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밀라노에서 <사랑의 묘약>을 성공시키고, 나폴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광란의 무대를
삽입하여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성공시켰다. 1839년 나폴리에서 공연한 <폴리우토>가 당국의 검열에 걸려 거부되자
파리로 옮겨 작곡을 계속했다. 파리에서 발표한 코믹 오페라 <연대의 딸>과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전통을 그대로 적용한
<파보리타>는 그의 명성을 계속 뒷받침해주었다. 두통과 신경마비에 시달리던 말년에도 오페라 부파 <돈 파스콸레> 등을
성공시켰다. 그의 작곡 속도는 가히 전설적이었다. 25년 남짓한 기간동안 70개의 오페라, 12개의 현악 4중주, 7개의 미사곡을 비롯하여 각종
가곡, 관현악곡 등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랑의 묘약>은 8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추천 음반>
<사랑의 묘약> - 1) 데비아, 알라냐,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 비오티 - Erato
98483,
2) 베틀, 파바로티,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 레바인 - DG 429744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1)
칼라스, 디 스테파노, 마지오 무지칼레 오케스트라/ 세라핀 EMI 69980,
2) 스투더, 도밍고, 런던 심포니/마린 - DG
435309
12.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 이탈리아)
베르디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산역사이자
도니제티, 벨리니, 로시니를 잇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큰 산맥이다.
애국심이 강했던 그의 기질이 1850년대의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겹쳐
그의 음악은 애국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이런 연유로 인해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완성되었을 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부세토에서 식료품과 여관을 겸한 집안에서 태어난 베르디는 떠돌이 악사의 음악을 실컷 들으며 자랐다. 1939년에 첫 작품인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초연해서 성공한 후 1842년에 <나부코>로 이탈리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이후 그의
음악은 최후의 작품 <팔스타프>(1890-92)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변해간다. 초기의 신화적이고 비인간적이던 인물은
<리골레토>(1851)처럼 점차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성격을 지녀간다. 그의 인물들은 비극적 숙명 앞에서 불가능한 정열을 불태우는
인간적 고뇌를 보여준다. 연극과 음악을 탄탄하게 결합시키고 사실적인 내용을 풍부한 색채의 음악으로 그려내면서 그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다. 중기의
3대 거작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에 이르러선 유럽 전역으로 그의 이름이 퍼져나갔으며,
이 오페라는 지금도 세계 오페라 극장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어있다. 그는 26개의 오페라를 작곡한 후 88세의 나이로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아이다> - 1) 칼라스, 터커, 바르비에리, 곱비, 스칼라 오케스트라/ 세라핀 EMI
49030,
2) 프라이스, 고르, 비커스, 로마 오페라 오케스트라/ 솔티 - Decca 417416
*<오텔로> -
1) 델 모나코, 테발디, 빈필/ 카라얀 - Decca 411618,
2) 비나이, 발덴고, NBC 오케스트라/ 토스카니니 -BMG
60302
*<리골레토> - 1) 베르곤치, 피셔-디스카우, 스칼라 오 스트라/ 쿠벨릭 - DG 437704,
2)
칼라스, 곱비, 디 스테파노,스칼라 오케스트라/ 세라핀 EMI 47469
*<라 트라비아타> - 1) 칼라스, 디 스테파노,
스칼라 오케스트라/ 줄리니 - EMI 63628,
2) 스코토, 크라우스, 브루손,필하모니아/ 무티 EMI 47538
*<일
트로바토레> - 1) 밀라노프, 비욜링, 워렌, 바르비에리, RCA 심포니/ 첼리니 BMG 86643,
2) 프라이스, 도밍고,
뉴필하모니아/ 메타 - BMG RD86194
*레퀴엠 - 1) 슈바르츠코프, 루트비히, 게다, 갸로프, 필하모니아/ 줄리니 - EMI
47257,
2) 던, 커리, 해들리, 플리슈카,아틀랜타 심포니/ 쇼 Telarc 80152
13. 자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1924, 이탈리아)
푸치니는 1901년 베르디가 죽은 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저력을 다시 드러낸 작곡가다. 5대째 내려오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76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본 후
오페라 작곡가로 결심을 굳히고 1880년에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가난했던 푸치니는 마스카니와 함께 하숙생활을 하며 고생 끝에 졸업하게
되었는데, 이때 <교향적 카프리치오>를 작곡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884년 첫 오페라로 폰타나의 대본에 의한 <요정
빌리>를 발표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 <요정 빌리>와 <에드 가>의 초연 실패, 사생활의
문제등이 겹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오다가 1893년에 리코르디사의 협조로 무대에 올린 <마농레스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명성을
얻게되었다. 이후 <라보엠>(1896), <토스카>(1900), <나비부인>(1904)을 잇달아 내놓으며 유럽
전역에 푸치니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본 작가 자코모의 죽음, 하녀와의 스캔달 등으로 슬럼프에 빠진 푸치니는 1910년 뉴욕에서
<서부의 아가씨>가 초연하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1918년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스키키>를 묶어 3부작으로 발표하면서 정상의 오페라 작곡가임을 다시 입증시켰다. 푸치니는 담배를 무척 좋아해서 14세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결국 1924년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작
<투란도트>는 제자였던 알파노에 의해 완성되어 1926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멜로디, 극적 구성의 묘미, 섬세한 성격 표현, 관현악의 극적 효과 등이 어우러져 푸치니의 오페라는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가 되었다.
<추천 음반>
*<라 보엠> - 1) 데 로스앙헬레스, 비욜링, RCA 오케스트라/ 비첨 EMI 47235,
2) 프레니, 게다, 로마 오페라 오케스트라/ 스키퍼스 - EMI 69657
*<나비부인> - 1) 테발디, 베르곤치,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세라핀 Decca 425531,
2) 프레니, 루트비히, 파바로티,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카라얀 -
Decca 417577
*<토스카> - 1) 칼라스, 디 스테파노, 스칼라 오케스트라/ 데 사바타 EMI 56304,
2) 프라이스, 디 스테파노,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카라얀 - Decca 421670
*<투란도트> - 1)
서덜랜드, 파바로티, 런던 필하모닉/ 메타 - Decca 414274,
2) 닐손, 코렐리, 로마 오페라 오케스트라/ 프라델리 - EMI
69327
14. 페루치오 부조니 (Ferruccio Busoni, 1866-1924, 이탈리아)
부조니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순회악단의 유명한
클라리넷 주자였고, 어머니 또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그 영향 하에 자란 부조니는 8세에 공개 무대를 가졌고, 4년 후인 12세의 나이로
자신이 작곡한 <스타바트 마테르>를 지휘할 정도로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브람스를 흠모한 그는 라이프치히를 여행했고, 거기서 많은
음악가들과 교분을 쌓게 되었다. 1889년 부조니는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엔 그의 제자였던 스웨덴 여성 게르다와 결혼했다.
모스크바와 보스턴에서도 교수로 활동했으며 베를린에서 펼친 그의 마스터클래스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그는 절세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자
교수이자 지휘자로 활동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작곡가로서의 부조니는 16세기의 선법 화성법에서 다조성 양식과 심지어 전자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들을 수용하면서도 언제나 주지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관계로 인해 그의 작품 중에는 피아노 작품이 대부분이다.
<엘레지>를 비롯하여 1910년에서 12년 사이에 쓰여진 <대위법에 의한 환상곡> , 1910년부터 10년동안 쓰여진
6개의 소나타 등은 그의 대표적인 피아노 곡들이다. 이 외에도 그는 교향곡을 비롯한 대규모의 곡들도 다수 작곡했는데 오페라 <파우스트
박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대작으로 이름높다.
<추천 음반>
*<파우스트 박사> - 피셔-디스카우, 콘, 슈미트, 바이에른 국립 방송교향악단/ 라이트너
-DG 427413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2번 - 시게티(바이올린), 호르초프스키(피아노), 리틀 오케스트라 소사이어티/
셰르만 - CBS MPK52537
15. 오토리노 레스피기 (Ottorino Respighi, 1879-1936, 이탈리아)
레스피기는 코스모폴리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고향인 볼로냐의 음악학교를 거쳐 1900년부터 1903년 사이엔 두 번이나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체제하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르침을 받았고, 1908년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막스 브루흐에게 배웠다. 작곡 뿐 아니라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등에도 능했던 그는
1900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에서도 활동한 바 있으며, 1903년부터 1908년까지는 무젤리니 현악 4중주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3년부터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가 되었고, 1924년에는 그 곳의 원장이 되어 2년간
역임했다. 이후 그는 작곡과 연주생활에 주력하면서 유럽과 미국 등지를 여행했다. 그의 존재를 가장 잘 알린 곡으로는 유명한 <로마
3부작>을 들 수 있다. <로마의 분수>(1914-16) <로마의 소나무>(1923-24) <로마의
축제>(1928)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뷔시의 영향색채적 관현악법과 감각적인 화성이 잘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레스피기는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입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세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안 찬트 형식에 관심을 보여
<교회의 유리창>같은 고풍의 양식을 도입한 곡을 쓰기도 했고, <류트를 위한 옛 아리아와 옛 춤곡>같은 편곡 작품도
남겼다.
<추천 음반>
*로마 3부작 - 1) 체코필/ 페드로티 - Supraphone 11-0291-12,
2)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무티 EMI 47316
*류트를 위한 옛 아리아와 옛 춤곡 - 1) 보스턴 심포니/ 오자와 - DG 419868,
2)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DG 437533
● 오스트리아 작곡가
1. 하인리히 이그나츠 프란츠 폰 비버 (Heinrich Ignaz Franz Von Biber,1644-1705, 오스트리아)
17세기 독일 음악원에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꼽으라면 응당 비버를 꼽아야 할 것이다. 크로메리츠, 에겐베르크, 리히텐슈타인 등의
궁정음악가를 거쳐 1673년엔 잘츠부르크 궁정에 입성, 결국 악장이 되었으며, 1684년엔 레오폴트 1세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바흐로부터
파헬벨에 이르는 당대의 어떤 음악가도 바이올린의 기법에 관한 한 비버를 당할 수 없었다. 신비주의적인 장식이 가득한 그의 바이올린 세계는 여러
가지 기법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특히 스코르다투라 기법은 최고로 발전된 형태를 확립해 놓았다. 그 가장 좋은 예가 그가 남긴 솔로 바이올린
소나타들이다. 1693년에 간행된 <기교적이고 즐거운 합주>, '마리아 생애의 15개의 신비에 대한 예찬'이란 부제가 붙은 15개의
<로잘리오 소나타>, <현을 위한 10개의 춤곡집> 등은 모두 신비한 음형과 바이올린 기법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곡이다.
비버의 곡들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가 현대에 들어 고음악에 대한 복원 과정에서 비로소 대접받게 되었다.
<추천 음반>
*미스테리 소나타 - 홀로웨이(바이올린), 모로니(하프시코드), 트라지코메디아 - Virgin 59551
*바이올린 소나타집 - 로마네스카 HMU-907184
*멘자 소노라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 괴벨(바이올린) - Archiv
423701
*기교적이고 즐거운 합주 - 라몽(바이올린), 타펠 무지크 - Sony 58920
2.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 오스트리아)
글루크는
1731년 프라하 대학에 입학했지만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프리랜서 음악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빈으로 옮긴 글루크는 로프코비츠 후작의 도움을
받아 롬바르디아의 귀족 멜치 후작을 알게 된다. 글루크의 재능을 간파한 멜치 후작의 주선으로 글루크는 관현악단에 입단했고, 1737년에 밀라노
유학 길에도 오르게 된다. 밀라노에서 그는 삼마르티니에게 작곡을 배웠다. 1741년 말, 그의 첫번째 오페라 <아르타세르세>가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3년동안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오페라 세리에를 청탁받아 7곡을 초연했다.
1946년엔 런던 킹스시어터의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갔다. 거기서 글루크는 헨델과 함께 자선 음악회를 주관했다. 1752년 힐데부르크하우젠 후작의
관현악단 지휘자에 취임하면서 빈에 정착한 그는 계속해서 음악적 입지를 넓혀 나갔다. 1754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일가를 초청하여 오페라
<중국인>을 상연, 궁정극장 지배인인 자코모 두라초 백작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글루크는 백작의 지원으로 오페라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백작으로부터 소개받은 대본 작가 라니에로 칼차비치와의 공동작업은 의미심장했다.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알체스테> <파리스와 헬레나>같은 혁신적 오페라들이 모두 이 당시에 작곡되었다. 글루크는 음악을 언어와 어울리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불필요한 음악적
장식이나 가수 위주의 작곡을 배제하고, 서곡을 드라마와 밀접하게 연관시키켰으며,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오페라가 혼융된 국제적인 오페라를 만드는 것을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분명 바로크적 전통에 뿌리를 내린 채 음악을 시작했지만,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를 잇는 가장 훌륭한 가교 역할을 수행해 낸 것이다.
<추천 음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 1) C.P.E 바흐 챔버오케스트라/ 헨센 - Capriccio
60-008,
2) 라긴, 맥네어,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트/ 가디너 Philips 431093
3. 요제프 하이든 (Joseph Haydn, 1732-1809, 오스트리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든은 8세때부터 성 슈테판
교회의 소년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27세 되던 해, 칼 조세프 프란츠 모르친 백작의 여름 거주지인 보헤미아에서 악장으로 활동했으며 이 때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작곡했다. 1761년 헝가리의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거느린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에 취임했고, 안톤 후작이 사망한 후 동생인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가 뒤를 이으면서 하이든의 위치는 더욱 높아졌다. 1766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모든 책임을 맡게 되면서 하이든의
창작 활동도 절정을 이루었다. 교향곡 45번 <고별>을 비롯하여 48번 <마리아 테레지아>, 수난곡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현악 4중주 <러시아 4중주곡>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1790년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하이든은 잠시
후작가의 악장직을 그만두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영국에서 들은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감명받아 작곡한 것이 유명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였다. 그가 에스테르하지 후작가의 악장직에서 은퇴한 것은 1804년 그의 나이 72세때였다. 평생동안
1백곡이 넘는 교향곡, 80곡이 넘는 현악 4중주를 작곡해서 고전주의 음악을 확립했다. 참고로 그는 28세 때 세 살 연상의 가발집 딸 마리아
켈러와 결혼했는데 이 여인은 남편이 갓 작곡한 오선지를 냄비받침으로 쓸 정도로 몰지각한데다 낭비벽, 신경질이 많은 악처였다.
<추천 음반>
*첼로 협주곡 1,2번 D장조 - 1) 빌스마(첼로), 타펠무지크/ 라몽 DHM 77757,
2)
코앙(첼로), 고음악 아카데미/ 호그우드 -Oiseaus-lire 414615
*트럼펫 협주곡 - 1) 나카르자코프(트럼펫), 로잔느
실내관현악단/ 로페즈-코보스 - Teldec 90846,
2) 하덴버그(트럼펫), 성 마틴 인 더 필드/ 매리너 Philips
420203
*교향곡 45번 <고별>, 48번<마리아 테레지아> - 1) 레스트로 아르모니코/ 솔로몬 - Sony
MDK46507,
2) 카펠라 이스폴리타나/ 워즈워스 Naxos 550382
*교향곡 94번<놀람>,
104번<런던> - 1) 런던 필/ 요훔 - DG 437201,
2)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슬래트킨 BMG 62549
*현악 4중주 <십자가상의 일곱말씀> - 1) 케루비니 4중주단 - EMI 49682,
2) 린제이 4중주단 ASV
CDDCA853
*현악 4중주 77번<황제>, 78번<일몰> - 1) 토쿄 4중주단 - Sony SB2K53522,
2) 코다이 4중주단 Naxos 550192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 1) 베를린필/ 카라얀 - DG 449761,
2) 라 프티트방드/ 쿠이켄 Accent 58228
4.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오스트리아)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3세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한 신동이었다. 5세부터 피아노곡을 작곡했고, 7세때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그리고
8세때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레오폴트는 볼프강과 그의 누이 난네를에게 철저한 음악 훈련을 시켜, 이 둘을 유럽
각국의 궁정으로 연주 여행을 데리고 다녔다. 이 여행은 그의 나이 11세 되던 1762년 초 뮌헨 여행으로부터 시작하여 1779년까지 무려
1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비록 힘든 여행이었지만, 이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만하임 학파, 파리 음악계, 이탈리아 오페라 등을 두루 섭렵하여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만하임 여행 중에 그는 작곡가 베버의 조카딸인 알로이자 베버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아버지의 추궁을
들으며 파리로 쫒겨가야 했다. 파리의 생활은 비참했으며 그 곳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잃어버린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1781년에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불화로 궁정 음악가를 그만두고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알로이자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교사와
작곡가를 겸하는 프리랜서 음악가가 되었으나 경제적으로 몹시 곤궁했다. 그러나 가난과 싸우면서 필사적으로 작곡해내던 이 시기에 <교향곡
39, 40, 41번>, <클라리넷 5중주>, 오페라 <요술피리>, <레퀴엠> 같은 걸작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1791년에 들면서 모차르트의 경제는 조금씩 나아질 기미가 보였으나 그 땐 이미 쇠약해진 이후였고, 결국 이 불세출의
천재는 그 해 11월에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클라리넷 협주곡 - 1) 브라이머(클라리넷), 성 마틴 아카데미/ 매리너 - Philips 426148,
2) 킹(클라리넷),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 테이트 - Hyperion 66199
*피아노 협주곡 20, 21, 27번 -
1) 페라이어(피아노),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 Sony SK42241, 46485,
2) 로베르 카자드쉬(피아노), - Sony
SM3K 46519
*바이올린 협주곡 3,4,5번 - 1) 그뤼미오(바이올린), 런던 심포니/ 데이비스 Phlips 438223,
2) 스턴(바이올린),컬럼비아 심포니 외/ 셸, 슈나이더 - Sony SM3K 66475
*교향곡 35번<하프너>,
36번<린츠>, 38번<프라하>, 39, 40, 41번<주피터> - 1) 성 마틴 아카데미/ 매리너 -
Philips 422502,
2) 베를린 필/ 뵘 DG 447416
*교향적 협주곡 K.364 - 1)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비올라), 베를린 필/ 오이스트라흐 -EMI 64632,
2) 펄만(바이올린),
주커만(비올라), 이스라엘 필/ 메타 - DG 415486
*클라리넷 5중주 - 1) 브룬너(클라리넷), 하겐 4중주단 - DG
419600,
2) 킹(클라리넷), 가브리엘리 4중주단 - Hyperion 66199
*바이올린 소나타 K.304, 378 -
1) 그뤼미오(바이올린), 하스킬(피아노) - Phlips 412253,
2) 뒤메이(바이올린),피레스(피아노) - DG 431771
*피아노 소나타 8번 K.310, 11번 K.331, 14번 K.457 - 1) 페라이어 Sony SK48233 (8, 11번),
2) 피레스 - DG 429739 (11,14번)
* 환상곡 D단조 K.397 - 1) 우치다 - Philips 412123,
2) 피레스 - DG 431760
*레퀴엠 K.626 - 1) 맥네어, 아라이자, 성 마틴 아카데미/ 매리너 - Philips
432087,
2) 보니, 폰 오터, 잉글리쉬 바로크 솔로이스츠/ 가디너 Philips 420197
*<돈 조반니> -
1) 슈미트, 아르헨타,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 노링턴 - EMI 54859,
2) 슈바르츠코프, 서덜랜드,알바, 필하모니아/ 줄리니
- EMI 47260
*<요술피리> - 1) 로렌거, 프라이, 빈필/ 솔티 - Decca 414568,
2) 조수미,
크라우스, 빈필/ 솔티 Decca 433210
*<피가로의 결혼> - 1) 귀덴, 델라 카사, 단코, 시에피, 빈필/ 에리히
클라이버 Decca 417315,
2) 야노비츠, 마티스,피셔-디스카우, 베를린 도이치오퍼 오케스트라/ 뵘 - DG 429869
5. 요한 슈트라우스 1세 (Johann Strauss, 1804-1849) &
요한 슈트라우스 Jr. (Johann
Strauss Jr.,1825-1899, 오스트리아)
비올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겸 작곡가로 다재다능했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비올라 주자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라너 4중주단과 라너 악단을 거쳐 1825년에 자신의 악단을 만들고 이듬해부터 유럽 연주여행을
다녔다. 1846년엔 빈 궁정 무도회장의 음악감독이 되어 쇤부른궁에서 펼쳐지는 오스트리아 궁정 무용 음악 일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250여개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의 150개가 왈츠였다. 그 외에 <라데츠키 행진곡>같은 행진곡, 폴카, 갤럽등을 남겨놓았다. 그의
성과는 그보다 실력이 좋았던 장남에 의해 오히려 가려져버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공부한 끝에 결국
1844년에 자신의 악단을 만들어 아버지의 악단과 대립하게 되었다.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악단을 통합하여 유럽 각지를 순회했다.
"왈츠의 황제"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비롯한 400여곡의 왈츠를 작곡해냈다. 또한 60여개의 콰드리유,
130여개의 폴카를 작곡했으며, 그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오페레타에도 진출하여 <집시 바론> <박쥐>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추천 음반>
*<박쥐> - 바라디, 포프, 프라이, 바이에른 국립교향악단/ 클라이버 DG 415646
*왈츠곡집 - 1989, 92년 신년음악회 실황 - 빈필/ 클라이버 Sony SX3K 53385
6. 안톤 브루크너 (Anton Bruckner, 1824-1896, 오스트리아)
북오스트리아에서 교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야인(野人) 브루크너는 조용하고 성실하고 겸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방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공적인 연주를 한
것이 그의 데뷔무대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열 살이었다. 성 플로리안의 성가대원으로 음악 수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린츠에서 음악교사과정을
밟았다. 1851년에 가까스로 성 플로리안의 정식 오르간 주자가 된 브루크너는 1855년부터 린츠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여 이후 13년
동안 이 곳에서 활동했다. 그와 병행하여 1861년까지 빈에서 '늦깍이 학생'으로 대위법 수업을 받았다.
1863년-64년에
<D단조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이 곡은 이후 작곡가 자신에 의해 <0번 교향곡>으로 명명되었다. 이 때부터 조금씩 명망을
얻게된 브루크너는 1868년 빈 제국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겸 빈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10개의 교향곡과 <테
데움>을 비롯한 종교곡들을 썼다. 그의 대규모 작품들은 바그너와 베토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바그너 반대파와
당시의 지휘자들로부터 심하게 배척받아야 했다.
<추천 음반>
*교향곡 3번 - 1)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반트 RCA 61374,
2)드레스덴 국립
교향악단/시노폴리 - DG 431684
*교향곡 4번 <로맨틱> - 1) 베를린필/ 요훔 - DG 427200,
2)
빈 필/ 뵘 Decca 425036
*교향곡 5번 - 1) 베를린 필/ 요훔 - Philips 426107,
2) 뢰겐/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 Berlin Classics 3011-2
*교향곡 8번 - 1) 빈필/ 슈리히트 - EMI,
2) 빈필/ 카라얀
- DG 427611
*교향곡 9번 - 1) 빈필/ 슈리히트 - EMI 67279,
2) 드레스덴 가극장 오케스트라/ 요훔 -
EMI 62935
7. 후고 볼프 (Hugo Wolf, 1860-1903, 오스트리아)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격정적이었던 볼프는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그 성격의 삯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는 소위 '문제아'였던 그는 빈 음악원에 입학해서 말러와
동기로 지냈지만 이내 품행불량으로 퇴학당하고 말았다. 결국 독학으로 음악을 배울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이념적 목표는 바그너의 음악이었다.
1881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잘츠부르크 시립가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지만 이 역시 자제심이 없는 그의 성격때문에 곧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버터 빈에서 음악 비평가와 교사로 생활을 이어갔다. 바그너파와 브람스파가 대립되었을 땐 반브람스파의 선봉에서서 펜을 휘두르기도 했다. 청년
시절부터 매독으로 인한 마비증상을 보이던 그는 1897년 최후의 가곡집 <미켈란젤로의 시에 의한 3개의 가곡집>을 마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자살 소동까지 벌이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볼프는 슈베르트, 슈만으로 이어져 온 독일 낭만주의 가곡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이었다.
7개의 가곡집을 포함, 그가 남겨놓은 300곡의 가곡에선 피아노와 노래의 동등한 관계가 거의 교향악적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다.
<추천 음반>
*괴테 가곡집 - 오제, 개이지(피아노) - Hyperion 66590
*이탈리안 가곡집 -
슈바르츠코프(소프라노), 피셔-디스카우(바리톤), 무어(피아노) EMI 63732
* 스페인 가곡집 - 슈바르츠코프, 피셔-디스카우,
무어(피아노) - DG 423934
8.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보헤미아)
보헤미아에서 독일어권 유태계의 자손으로 태어난 말러는
빈 음악원에서 작곡, 피아노, 지휘를 배웠다. 빈 음악원 시절 그는 휴고 볼프와 같은 방을 썼다고 한다. 1880년경부터 그는 지휘자와 작곡가의
일을 시작하여 이내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류블리아나, 카젤, 프라하, 라이프치히 등을 거쳐 1888년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취임했으나 3년을 못채우고 떠나 함부르크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일했다. 1897년엔 빈 궁정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옮겨 셈족 반대운동으로
사임하기까지 10년동안 이 곳에서 지휘했다. 1898년부턴 빈 필하모니도 지휘하면서 말러는 유명한만큼 바쁜 사람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던 시간은 매년 여름의 휴식기에 한정되었다. 이 여름 휴식기를 이용하여 그는 10개의 교향곡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을
작곡해냈다. 그러나 이 기간은 또한 말러에게 있어 슬픔의 시기였다. 4세밖에 안된 그의 딸이 죽는 비극과 아내 알마와의 불화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나온 곡이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였다. 1907년 그는 미국으로 떠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 뉴욕 필을 정기적으로
지휘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재개했으나 건강을 크게 다쳐 1911년 4월에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달 후, 말러는 사랑하는 딸의 무덤
곁에 묻혔다. 말러의 작품세계는 10개의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의 가곡이 주축을 이룬다.
<추천 음반>
*교향곡 1번 <거인> - 1) 런던 심포니/ 호렌슈타인 - Unicorn 2012,
2) 컬럼비아 심포니/ 발터 - Sony M2YK 45674
*교향곡 2번 <부활> - 1)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 66897,
2) 오제, 베이커, 버밍엄 심포니/ 래틀 EMI 47962
*교향곡 5번 - 1) 뉴 필하모니아/ 바비롤리
- EMI 78974,
2) 빈필/ 번스타인 - DG 423608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 - 1) 코넬, 로트,
런던필/ 텐슈테트 EMI 47625,
2) 프라이스, 블레겐, 빈필/ 번스타인 - DG435102,
*교향곡 9번 - 1) 빈필/
번스타인 DG 435378,
2) 베를린 필/ 카라얀 DG 410726
*대지의 노래 - 1) 페리어, 파차크, 빈 필/ 발터
Decca 414194,
2) 루트비히, 분덜리히, 필하모니아/ 클렘페러 - EMI47231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 1)
피셔-디스카우, 베를린필/ 켐페 - EMI 747657,
2) 루트비히, 필하모니아/ 반데르노트 -EMI 69499
9. 프란츠 레하르 (Franz Lehar, 1870-1948, 오스트리아)
헝가리에서 태어났으나 보헤미아의 프라하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12년간의 군악대장을 거쳐 빈에서 지휘자와 작곡가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빈에서 오스트리아의 낙천적 정서에 매료되어 오페레타,
행진곡, 왈츠 등을 주로 작곡했다. 1902년에 작곡한 왈츠 <금과 은>이 크게 사랑받았고, 1905년에 작곡한 오페레타
<명랑한 과부>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엔 명테너 타우버와 함께 오페레타의 질을 높여나갔다. 그는 아내가
유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명랑한 과부>를 맘에 들어한다는 이유로 인해 빈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에 대한 그의
애매한 태도로 인해 전쟁 후엔 공란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레하르의 음악은 가볍고 명랑한 정취와 함께 강력한 감각을 갖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전염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작곡한 오페레타 <명랑한 과부>와 <미소의 나라>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와 함께 오페레타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추천 음반>
*<명랑한 과부> - 슈바르츠코프, 게다, 필하모니아/ 마타치치 - EMI 47178
*<미소의 나라> - 슈라르츠코프, 게다, 필하모니아/ 애커만 - EMI 769523
10. 알렉산드르 쳄린스키 (Alexander Zemlinsky, 1871-1942, 오스트리아)
빈 토박이인 쳄린스키는 빈
음악원을 졸업한 후 1900년부터 빈의 칼극장에서 지휘봉을 잡았고 1904년에는 빈 국민오페라단에서도 일했다. 1904년엔 그의 제자이자 매제인
쇤베르크와 함꼐 <창의적 음악가협회>를 결성, 신음악들을 장려해나갔다. 1911년엔 말러 아래서 궁정 오페라단을 지휘하기도 하다가
프라하로 옮겨 신독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여기서 1927년까지 일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오페라 <피렌체의 비극>(1917)이나
바리톤,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서정 교향곡> 등 그의 대표작들을 생산해냈다. 1927년부터 31년까지는 베를린
크롤오페라단에서 오토 클렘페러와 함께 지휘자로 일했고 이 활동은 그에게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나치가 득세하면서 미국으로 망명한
쳄린스키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가난에 시달리다가 1942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러, 슈트라우스의 후기 낭만주의와
쇤베르크 등 제2 빈악파와의 가교적인 위치에 서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경향은 전자와 가까웠다. 특히 브람스와 바그너의 곡에 대한 그의 지휘는
많은 인기를 모았다.
<추천 음반>
*서정교향곡 작품18 - 바라디, 피셔-디스카우, 베를린필/ 마젤 - DG 419261
*시편
13, 23 -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샤이 - Decca 444969
*<피렌체의 비극> - 소펠, 리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알브레히트 - Koch Schwann 314012
11. 아르놀트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 1874-1951, 오스트리아)
쇤베르크는 서양음악사를 지배해왔던
기능적 화성을 버리고 무조성과 12음을 창안해낸 현대음악의 거장이다. 베르크,베베른과 함께 제 2차 빈학파를 결성,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두에
섰다. 빈의 유태인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작곡을 익힌 쇤베르크는 은행원 생활을 병행하면서 쳄린스키가 지휘하는 아마추어 관현악단의 첼로
주자로 활동했다. 당시 쳄린스키에게서 잠시 배운 대위법 교육이 그가 일생동안 배운 공식적 음악교육의 전부였다. 성악곡 <구레의 노래>
초고를 보고 감명받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에게 리스트 장학금을 받게 해주고 이어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학교 작곡교사로 천거해 주었다.
베를린 체류 기간동안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작곡한 쇤베르크는 그 작품과 함께 조성을 던져버렸다. 빈으로 돌아온 쇤베르크는
베베른, 베르크의 작곡을 지도하면서 <현악 4중주 2번>(1908), <달의 피에로>(1912) 등을 발표한다. 이
작품들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18년에 쇤베르크는 베베른, 베르크와 함께 <사적 작곡가협회>를 결성하고 1921년까지 1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열었으며 400곡에 가까운 현대음악 작품을 연주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쇤베르크는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교수직에서
쫒겨나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로스엔젤레스에 자리를 튼 쇤베르크는 <바르샤바의 생존자>(1947) 등의
작품을 쓰다가 거기서
삶을 마감했다.
<추천 음반>
*실내교향곡 1,2번, 정화된 밤 -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DG 429233
*달의 피에로 -
앙상블 모데른/ 요트보스 - BMG 61179
*바르샤바의 생존자 - 빈필/ 아바도 - DG431714
12. 안톤 베베른 (Anton Webern, 1883-1945, 오스트리아)
베베른은 쇤베르크, 베르크와 함께 제 2차 빈학파를
결성, 12음 기법과 무조음악의 세계를 개척한 장본인이다. 빈 대학에서 철학과 음악학을 공부하던 그는 1904년 쇤베르크를 만나 그의 혁명적인
음악 스타일에 동조하게 된다.이후 오스트리아 각지에서 지휘자로 일했고 1918년부터 22년까지 쇤베르크가 창립한 <사적 연주협회>의
멤버로 현대음악 연주에 주력해. 1927년엔 빈 방속국 지휘자로 취임하여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히틀러 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쇤베르크가 미국으로 떠나고 베르크마저 세상을 떠나자 음악출판사 등지를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잘츠부르크
교외의 미터질에 피신해 있던 베르크는 담배를 피다 연합군 측 병사의 오인으로 사살되었다. 베베른의 음악은 치밀한 구조로 쇤베르크의 이념을 가장
잘 실현해 놓았다. 음열 음악적 테크닉이나 특정음과 특정 가치를 연결시키는 그의 탐구는 피에르 불레즈를 비롯한 많은 젊은 작곡가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2차 대전 후 <포스트 베베른 양식>으로이어졌다.
<추천 음반>
*파사칼리아 작품1 -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 케겔 - Berlin Classics 0090202
*현악 4중주를 위한 느린 악장 - 아르디티 4중주단 Montagne 789008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작품 27 431-
폴리니(피아노) DG 419678
13. 알반 베르크 (Alban Berg, 1885-1935, 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상인의 자제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처음엔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으나 1904년에 당대의 유명 작곡가 아놀트 쇤베르크를 만나게 된 이후 1910년까지 그의 지도 하에 숨은
재능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초기의 가곡들에선 고전적 조성에 영향을 받은 모습이 보이지만 이후엔 기능적인 화음체계를 버리고서 무조성 음악과
12음 음악으로 향했다. 문학에 대한 조애가 깊었던 베르크는 오스트리아 근대시뿐 아니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까지 그의
세계에 동원했다.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과 함께 제 2빈 학파를 창설했으며 이 학파는 초기 20세기 음악의 전위적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5년 그의 오페라 <보체크>가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는 유럽 음악계에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오페라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강력한 음악극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한 후 그는 오페라 <룰루>를 작곡하다가
1935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추천음반>
*3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 1) 런던 심포니/ 아바도 - DG 423238
*바이올린 협주곡
- 1) 코간/ USSR 방송 오케스트라/ 로제스트벤스키 - Arlecchino ARL-6,
2) 펄만(바이올린), 보스톤 심포니/
오자와 DG 413725
*<보체크> - 1) 존슨, 피셔-디스카우, 베를린 도이치오퍼 오케스트라/ 뵘 - DG 435705,
2) 그룬트헤버, 베렌스, 빈필/ 아바도 DG 423587
● 러시아 작곡가
1. 알렉산드르 보로딘 (Alexander Borodin, 1833-1887, 러시아)
코카서스 왕자의 사생아로 태어난 보로딘은
원래 상트 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서 화학과 약학을 전공하여 그 방면에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과대학을 마친 후,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 플루트, 첼로를 연주한 경력을 살려 화학자와 음악가의 두가지 길을 같이 걸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그의 작품들이 미완성인 채로
남겨졌다.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큐이, 발라키레프와 함께 '러시아 5인조'로 불리며 러시아 근대 음악의 정초를 다졌다. 그의 작품은
실내악보다는 대규모의 교향곡들에서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예가 <교향곡 2번>이나 '음악적 그림'으로 불리는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같은 작품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보로딘은 그의 작품 속에 동방의 색채를 드리웠고 드뷔시와 라벨을 잇는 인상주의적 하모니를
선보였다.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초연된 오페라 <이고르공>은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함께 러시아 국민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이 되었다.
<추천 음반>
*교향곡 2번 - 모스크바 라디오 오케스트라/ 골로바노프 - Multisonic 31-0188
*현악 4중주 2번 - 탈리히 4중주단 Calliope CAL 9202
*<이고르공> - 키로프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게르기예프 Philips 442537
2.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 (Modest Mussorgsky, 1839-1881, 러시아)
무소르크스키는 프슈코프 지방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 어릴 적부터 음악교육을 받고 자랐다. 13세 되던 해 성트 페테르부르크의 근위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정열이 넘치던 그는 피아노 공부를 쉬지 않았으며, 사관학교 합창단에 들어 러시아 교회음악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857년 밀리 발라키레프를 만나 음악과 문화 일반에 대한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858년에는 음악을 위해
제대한 후 발라키레프,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큐이와 함께 이른바 <러시아 5인조>의 선두에 서서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을
창조해나갔다. 1861년 러시아에 농노해방이 밀어닥쳐 그의 집안도 큰 타격을 입었지만 무소르크스키는 항상 민중의 편에 서있었다. 그는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음악을 쓰고자 했고 이러한 사상은 그의 초기 오페라와 가곡들에 잘 드러난다. 섬세한 기질을 가진 그는 혁명적인 사회정세가
다시 전제주의로 치닫고 도덕적으로 퇴락하자 술에 빠져들었다. 결국 1880년에 정부 관리직을 사임하고 이듬해 알콜성 간질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전람회의 그림>과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들 수 있다.
<추천 음반>
*<민둥산의 하룻밤> - 1)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 RCA 61958,
2)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마젤 Telarc 80042
*<전람회의 그림> -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BMG 61401
*<전람회의 그림>(피아노판) - 호로비츠(피아노) BMG 60321
*<보리스 고두노프> - 라이페르쿠스,
리포첵, 베를린 필/ 아바도 - Sony S3K58977
3.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
보트킨스키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난 차이코프스키는 부모의 뜻을 따라 상트 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 관리가 되었다. 1855년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음악교실이 음악원으로 승격되자 관리직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았다. 1866년, 졸업과
동시에 모스크바 음악원 교사로 취직되어 1877년까지 이 곳에 머문다. 이 시기에 <러시아 5인조> 등과 교류하면서 작곡 활동에
매진한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 <백조의 호수> 등을 작곡해냈다. 1877년 차이코프스키는 불행한 결혼으로 심한 우울에
빠졌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정황이 음악으로는 상상력을 더해주어서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1877)과 <교향곡
4번>(1877), <바이올린 협주곡>(1878) 등을 일구어냈다. 1878년부터 1890년까지 그는 부유한 미망인 나데츠다 폰
메크에게 연금을 받게 되어 작곡에 전력할 수 있었다. 피아노 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1881-82), <교향곡
5번>(1888),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8-89) 등을 차례로 쏟아냈다. 1893년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지만 그해 11월에 교향곡 6번을 지휘한 후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아직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적으로는 동성애자라는 사회의 비난과,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과의 경솔한 결혼, 불행한 파혼, 그에따른 신경쇠약 등이
뒤따랐다.
<추천 음반>
*1812년 서곡, 이탈리아 기상곡 - 1) 신시네티 오케스트라/ 쿤젤 Telarc 80041,
2) 시카고 심포니/ 아바도 - Sony SK47179
*피아노 협주곡 1번 - 1) 아르헤리치(피아노), 바바리안 라디오
심포니/ 콘드라신 Pihlips 446673,
2) 호로비츠(피아노),NBC 오케스트라/ 토스카니니 - BMG GD60321
*바이올린 협주곡 - 1) 하이페츠(바이올린),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BMG 61495,
2)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드레스덴
국립교향악단/ 콘비츠니 - DG 423399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모음곡 발췌) - 1) 뉴욕필/
번스타인 - Sony SMK 47636,
2) 베를린필/ 로스트로포비치 - DG 429097
*교향곡 4,5,6번 - 1)
레닌그라드 필/ 므라빈스키 - DG 447423,
2) 오슬로 필/ 얀손스 Chandos 8361, 8351, 8446
*현악
4중주 1-3번, 플로렌스의 추억 - 보로딘 4중주단 - Teldec 90422 )
*피아노 3중주 A단조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 1) 린(바이올린), 호프만(첼로), 브론프만(피아노) - Sony SK53269,
2) 하이페츠(바이올린),
피아티고르스키(첼로), 루빈슈타인(피아노) - BMG GD87768
*<예프게니 오네긴> - 흐보로스토프스키, 포실, 쉬코프,
보로디나, 파리 오케스트라/ 비슈코프 Philips 438235
4.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 러시아)
무소르크스키와 마찬가지로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군인이었다. 12세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해군학교에 들어가서 이후 해군 장교, 해군 군악대 감독의 직업을 음악과
병행했다. 해군학교 시절인 1861년에 발라키레프를 알게되어 그 유명한 '러시아 5인조'를 결성하고서 "참된 러시아 음악"을 찾고자 골몰한다.
1871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어 평생동안 교육자로서 활동했다. 레스피기나 스트라빈스키같은 작곡가들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73년엔 해군 군악대 감독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겸하게 되었다. 지휘자로서의 명망도
높아서 유럽 각지에서 그를 초청했다. 그는 <사드코>(1894-95), <금닭>(1906-07)을 비롯한 14개의 오페라와
<스페인 카프리치오> <세헤라자데> <러시아의 부활제> 등의 관현악곡에서 특히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선율은
민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며, 화성과 작곡법은 글린카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공>,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호반시치나>도 그의 보필과 개정으로 완성되었으며,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도 그의 개정판에 의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추천 음반>
*셰헤라자데 -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 BMG GD60875
*스페인 기상곡 - 런던 심포니/
매케라스 Telarc 80208
*<사드코> - 키로프 오케스트라/ 게르기예프 Phlips 442138
5.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Alexandre Scriabin, 1872-1915, 러시아)
태어나서 2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그를 잘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즉흥적인 연주에 탁월했다고 한다. 1888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고, 이 때부터 종교와 신비주의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 곡인데, 초기 작품들은 쇼팽의 영향을 받은 후기 낭만주의 색채가 두드러졌으나, 후기로 오면 니체의 철학과 동양 종교적
신비주의로 가득찬 수수께끼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대표작인 <법열의 시>에선 종래의 기능적 화성과 결별을 시도했고, 교향곡
<프로메테우스 - 불의 시>에선 모든 음계를 색으로 환치하여 표현하려 했으며, 후기의 피아노 소나타들에선 색, 빛, 음, 향 등
갖가지 감각에 바탕을 둔 우주적 합일을 꿈꾸었다. 충동적이고 복잡한 리듬군들, 신비하리만큼 다채로운 음색을 가진 그의 음악 세계는 그러나 과장된
신비주의 사상 때문에 1920년 이후에 거의 잊혀져 있다가 현대에 들어 다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사람이 바다 위를 걷거나 날아 다닐 수 있다고
믿는 등갖가지 기행으로 인해 에릭 사티와 함께 가장 기이한 작곡가로 거론된다.
<추천 음반>
*교향시 <법열의 시>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마젤 - Decca 417252
*피아노 소나타 9번 <검은 미사> - 호로비츠 - Sony MK42411
6.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v, 1873-1943,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그의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시절이던 1891년에 쓴 것이다. 1897년 첫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라흐마니노프는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달 박사의 최면요법을 통해 가까스로 회복된 그는
1901년에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했다. 이 곡이 글린카 상을 받으면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이 때부터 시작해서
1917년 파리로 망명하기까지가 그의 작품활동의 전성기였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간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4번>
<심포닉 댄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등을 작곡했다.섬세하고 내성적이어서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세계는 낭만적인 멜랑코리로 가득차 있다. 만년에 들어 스탈린이 그를 1급 예술가로 대우하는 조건으로 귀국을 권유했으나 돌아가지 않고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피아노 협주곡 2번 - 1) 리히테르(피아노), 바르샤바 필하모닉/ 비슬로츠키 DG 447420,
2) 라흐마니노프(피아노),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스토코프스키 - BMG 5997
*피아노 협주곡 3번 - 1)
호로비츠(피아노), RCA 심포니/ 라이너 - BMG GD87754,
2) 호로비츠(피아노), 뉴욕필/오먼디 BMG 61564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 백건우(피아노), BMG
*교향곡 2번 - 1) 필하모니아/ 잔데를링 - Teldec
246008,
2)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얀손스 EMI 55140
*24개의 전주곡 - 1) 아슈케나지(피아노) Decca
414417,
2) 바이젠베르크(피아노) BMG GD60568
7.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1882-1971, 러시아)
스트라빈스키를 두고 메시앙은 <카멜레온
음악가> <1001개의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마린스키 극장 주역 베이스 가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법학과에 진학한 후 거기서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나게 되면서 작곡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이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정신적, 음악적인 스승으로 스트라빈스키를 도왔다. 1907년 <스케르초 판타스티크>가 초연했고, 이듬해엔 <불새>를
초연하여 그의 탁월한 관현악법을 선보였다. 1909년에 이 연주를 들은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구자 디아길레프가 그에게 파리 공연을 위해 쇼팽의
피아노곡을 편곡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 공연이 성공을 거둠으로서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러시아 발레단의 영광이 시작되었다. 1910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불새>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스트라빈스키는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 <페트루슈카>가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또 한번의 성공을 거두었다. 1913년엔 스트라빈스키의 걸작 <봄의 제전>이 몽퇴의 지휘로 신축한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거의 공연 역사상 최대의 예술적 스캔들이라 할 만큼 격렬한 야유와 함성이 이 곡에 쏟아졌지만 이듬해 다시 이 곡을 올렸을
땐 야유가 박수로 바뀌어져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하는 바람에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스위스에
머물면서 <병사의 이야기>(1918) 등을 작곡했다. 이 곡을 기점으로 그는 이전의 원시주의, 표현주의를 버리고 신고전주의로
이동했다. 1920년 마신의 안무와 피카소의 무대장치, 그리고 앙세르메의 지휘로 오른 <풀치넬라>는 또 한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39년 2차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51년 쇤베르크가 죽자 이전엔 반대했던
12음 기법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만년에는 음열주의 음악으로 이동하여 그에 따른 종교작품들을 남겼다. 전생애를 통해 110곡의 작품,
15곡의 편곡을 남겼다.
<추천 음반>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 뉴욕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불레즈 Sony SMK64109
*병사
이야기 - 스코틀랜드 국립오케스트라/ 예르비 Chandos 9189
*<오이디푸스 왕> - 슈라이어, 노먼,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오자와 - Philips 438865
8.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러시아)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를 잇는 20세기
러시아 음악의 거장 프로코피예프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 교육을 받은 그는 9세때 이미 자작 대본에
의한 오페라를 두 곡이나 작곡했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 이어 교향곡, 피아노곡등을 작곡하던 프로코피예프는 13세되던 1904년에
글라주노프의 권유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러시아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발레곡
<어릿광대>, 관현악곡 <스키타이 모음곡>, <고전 교향곡> 등으로 계속 주목받던 그는 1918년에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21년 시카고에서 오페라 <3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을 발표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유럽으로 옮겨서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활약했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곡도 작곡했다. 1932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프로코피예프는
어린이를 위한 <피터와 늑대>, 영화음악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오페라
<전쟁과 평화> 등 대중적인 작품에 주력했다. 1948년엔 지다노프 사건으로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비판받고, 이 즈음부터 건강이 나빠진
프로코피예프는 1953년 3월, 스탈린과 같은 날 모스크바에서 타계했다.
<추천 음반>
*피아노 협주곡 3번 - 아르헤리치(피아노), 베를린 필/ 아바도 DG 41062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1)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모스크바 필/ - Praga 250041,
2) 벤게로프(바이올린), 런던심포니/ 로스트로포비치
Teldec 92256
*<피터와 늑대> - 스팅,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 아바도 DG 429396
*교향곡 1번
<고전> - 1)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 DG 423624,
2) 필하모니아/ 말코 - CfP 4523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 1)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마젤 - Decca 417510,
2) 오슬로 필/ 얀손스
- EMI 49289(모음곡 1,2번)
9.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imitri Schostakovich, 1906-1975, 러시아)
쇼스타코비치는 그 작곡량의
방대함이나 내용의 깊이로 인해 20세기 러시아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인정받는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한 그는 졸업작품인 제 1교향곡으로 일약 소련의 천재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1927년 제 1회 쇼팽 콩쿠르에서 명예상을 받아
피아니스트로도 인정을 받았다. 작곡가로서 그의 지휘를 확립시킨 것은 1934년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동시 초연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이었다.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공격은 거셌다. <프라우다>지로부터 이 오페라에 대해
"음악이 아니라 진흙덩이"라고 비판과 "부르조아의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공격도 받는 바람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의 국민적인 작곡가가 되었으나 그에 따라 악의에 찬 공격도 증가했다. 1937년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초연된 제 5교향곡으로 인해 인기를
회복한 그는 이 해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47개나 되는 그의 작품 중에는 거대한 규모와 주제를 가진 교향곡만도 15개나
된다. 그러나 가벼운 음악들도 무시한 것이 아니어서 <재즈 모음곡>(1934)같이 당시의 러시아로선 상상하기 힘든 곡도 있으며,
<새 바빌론>과 같은 영화음악도 40여개나 들어있다.
<추천 음반>
*첼로 협주곡 1번 - 쉬프(첼로), 바바리안 라디오 심포니/ 쇼스타코비치 Phlips 412526
*피아노 협주곡 1,2번 - 아르헤리치(피아노), 뷔르템베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페버 DG 439864
*교향곡
5번<혁명> - 러시아 국립방송교향악단/ 로체스트벤스키 Olympia 113
*교향곡 7번<레닌그라드> - 런던
필/ 하이팅크 Decca 425068
*교향곡 13번<바비야르> - 모스크바 필/ 콘드라신 Russian Disk 11191
● 영국 작곡가
1. 헨리 퍼셀 (Henry Purcell, 1659-1695, 영국)
헨델이 영국에서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영국에는 퍼셀같은
작곡가가 있었다. 퍼셀은 6개의 극음악, 43개의 부수음악, 앤섬을 비롯하여 110곡의 종교성악곡, 기타 세속 독창곡, 합창곡, 트리오 소나타,
건반악기 작품 등 그 시대 음악의 모든 부분에서 혁혁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오페라 <디도와 아에네아스>(1689),
세미오페라 <아서왕>(1692), <요정의 여왕>(1692)를 비롯하여 찬가 <찬양하라 빛나는
세실리아>(1692), <오라, 너 예술의 아들이여>(1694), <메리여왕의 장송음악>(1695) 등은 현재에도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그의 수많은 앤섬(종교합창곡)은 언어가 가진 정서를 매혹적인 멜로디를 통해 드러내고 있으며, 비올 환상곡이나 트리오
소나타 분야에서도 당대에 필적할 만한 자를 찾기 힘들었다. 음악 가정에서 자란 퍼셀은 어린 시절 왕립예배당의 소년성가대을 거쳐, 오르간 조율사
등으로 일하다가 1677년에 왕실현악합주단의 상임작곡가에 임명되었다. 2년 후엔 스승이었던 존 블로우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애비의 오르간
주자에 취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했다. 비록 36세의 나이로 떠나버렸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대단했다. 그의 후학들은 퍼셀을 두고 "영국의
오르페우스"라 칭했다.
<추천 음반>
*<디도와 아에네아스> - 베이커,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 루이스 - Decca 425720
*<메리 여왕의 장송음악> - 웨스트민스터 애비 합창단, 뉴 런던 콘소트/ 니어리 Sony SK66243
*<성
세실리아의 날> - 가브리엘리 콘소트/ 매크리쉬 Archiv 445882
2.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1857-1934, 영국)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나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위치와
비교할 때 엘가야말로 영국이 낳은 첫번째의 국제적 작곡가라고 말할 수 있다. 지방 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 음악 기초를 배운 엘가는 거의 독학으로
유명 작곡가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때문에 엘가가 유명해지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1899년 런던에서 <수수께끼
변주곡>이 초연되어 엘가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 그의 나이는 41세나 되었다. 이듬해에 대규모 합창곡 <제론티우스의 꿈>이
발표되었으나 초연 때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이후 점차적으로 알려졌다. 엘가는 대규모의 관현악곡 외에도 협주곡, 실내악곡, 오르간곡,
관현악 소품, 독창곡 등 여러 분야에서 작품을 내놓았다. 특히 영국의 합창 전통에 입각한 합창곡들은 빛나는 부분이다. 47세때 기사에 서품되고,
만년에 들어선 준남작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되자 엘가는 실의에 빠졌고 그후에는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엘가는 그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에 나오는 트리오 선율을 <대관식 송가> 중에 다시 사용하여 이 곡에다
<희망과 영광의 나라>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 이 곡은 현재에도 영국에서 제2의 국가로 애창되고 있다.
<추천 음반>
*첼로 협주곡 - 1) 뒤 프레(첼로), 런던 심포니/ 바비롤리 - EMI 55527,
2)
나바라(첼로), 할레 오케스트라/ 바비롤리 -EMI 63955
*바이올린 협주곡 - 1) 시트코베츠키(바이올린), 메뉴인 - Virgin
45065,
2) 케네디(바이올린), 버밍엄 심포니/ 래틀 -EMI 56431
*교향곡 1,2번 - 1) 런던 필/ 보울트 -
EMI 64013,4 2) 런던 필/ 슬래트킨 BMG 60380, 60072
*수수께끼 변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바비롤리 -
EMI 566322
3. 구스타브 홀스트 (Gustav Holst, 1874-1934, 영국)
홀스트의 이름은 그의 관현악곡 <행성>과 거의
동일하게 받아들여진다. 이 작품은 1918년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홀스트는 음악교사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작곡과 트롬본을 익혔다.
학생시절엔 해변이나 거리에서 트롬본을 불어 돈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여학교의 음악교사로 평생을
지냈으며, 그 사이에 몰리 칼리지의 음악부장, 왕립음악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의 작품들은 퍼셀을 위시한 영국음악전통의 영향과 함께 그가
매료되었던 인도철학의 영향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1920년에 초연된 오라토리오 <예수 찬가>는 성가와 선법화성법, 그리고 그리스
리듬 등이 뒤섞안 홀스트의 테크닉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랄프 본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독일의 음악전통으로부터 탈피하여
영국의 자유로운 음악정신을 건져낸 대표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되었다.
<추천 음반>
*행성 - 1) 런던필/ 보울트 - EMI 64748,
2) 버밍엄 심포니/ 래틀 EMI
4. 윌리엄 월튼 (William Walton, 1902-1983, 영국)
교회 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운 월튼은 10세에
옥스퍼드 성가대에 입학하여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9년에 퇴학하여 시인인 시트웰의 누나의 집에 살면서 그녀의 시를 기초로 작곡한
실내악곡 <파사드>가 호평을 받아 일약 영국 예술계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1925년엔 관현악 서곡 <포츠머스 지점>이 큰
반응을 보여 그의 대중적 주가는 급격히 치솟았으며, 1929년엔 비올라 협주곡을 작곡해서 힌데미트가 초연했다. 계속해서 카라얀이 '금세기 최고의
합창곡'이라 칭송한 오라토리오 <벨사자르의 향연>을 내놓았고, 하이페츠를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또 한번
주목받았다. 1951년에 기사로 봉임되었으며, 이후 피아니고르스키를 위해 첼로 협주곡을 썼고,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무반주 첼로를 위한
파사칼리라>를, 조지 셀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위한 파르티타>들을 작곡했으며, <헨리 5세>와 같은 영화음악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 엘가의 뒤를 잇는 영국 작곡가의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았다.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20세기의 신랄한 리듬,
화성, 시대 정신을 도입하여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주었다.
<추천 음반>
*비올라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 케네디, 로열 필/ 프레빈 EMI 49628
*첼로 협주곡 -
해럴(첼로), 버밍엄 심포니/ 래틀 EMI 54572
*교향곡 1번 - 런던 심포니/ 프레빈 BMG 87830
5.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영국)
서포크 주 로스토프트에서 태어난 브리튼은 아마추어 가수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5세부터 작곡과 피아노와 비올라를 배웠다. 13세부터 프랑크
브리지에게 음악 이론과 작곡을 배운 브리튼은 다시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3년동안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1939년 영국을 떠나 북미를 여행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활동했고,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전쟁 레퀴엠>을 초연했다. 브리튼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곡은 1945년에 발표한 그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즈>였다. 탁월한 매력을 가진 이 곡은 영어 가사로 작곡된 오페라 중 가장
폭넓게 공연되고 있다. 1946년에 영국 오페라 그룹을 결성했고, 1948년엔 앨더버러 페스티벌을 창설했다. 브리튼은 아방가르드 음악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확립했다. 오든과 같은 문학가를 추앙했고, 테너 피터 피어스와 평생을 같이 했던 동성연애자였다. 특히 성악과 결부된 곡에서
그의 재능은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의 가사들은 타락한 순수성이나 사회의 이방인들에 대한 시선들을
강조하고 있다. <빌리 버드>
<한 여름 밤의 꿈> <오웬 윈그레이브>같은 오페라는 그의 대표작이다. 또한 그의 <전쟁 레퀴엠>은 문학에 대한
그의 사랑과 문학을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을 입증해보이는 작품이다.
<추천 음반>
*테너,혼,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 피어스(테너), 터크웰(혼), 런던 심포니/ 브리튼 - Decca
436395
*전쟁 레퀴엠 - 1) 비쉬네프스카야, 피어스, 피셔 디스카우, 런던 심포니/ 브리튼 - Decca 414383,
2) 하퍼, 렌그리지, 런던 심포니/ 히콕스 - Chandos 8983
*청소년을 위한 오케스트라 입문 - 런던 심포니/ 브리튼
- Decca 436990
● 미국 작곡가
1. 찰스 아이브스 (Charles Ives, 1874-1954, 미국)
아이브즈만큼 신기한 인생을 보낸 작곡가도 찾기 힘들다.
그는 밴드 마스터였던 아버지의 영향 하에서 자라나 14세에 고향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894년에 예일대학에 입학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다. 재학 중에 이미 교향곡 1번을 작곡했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뉴욕의 생명보험회사에 입사하여 8년 후엔
<아이브스&마이어릭 보험사>의 부사장이 되었고 이후 1930년까지 보험업계에 몸을 담았다. 그는 유럽음악인들이 다조성이나
무조성, 4분음, 우연성 음악을 실험하기 이전에 이미 그러한 테크닉을 경험했다. 그러나 당시의 음악도들과는 달리 아이브즈는 19세기말 아방가르드
음악의 테크닉들을 지극히 싫어했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한 미국적인 소재에 매달렸다. 게다가 은둔한 채 작곡하며 악보를 출판하는
일을 싫어했기 때문에 세인에게 알려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세상의 이목을 끈 것은 완성 후 40년만에 초연된 교향곡
3번이 1947년 퓰리처 상을 수상했을 때였다.
그는 이 수상식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상금도 타지 않았다. 1951년에 번스타인이 교향곡
2번을 거의 반세기만에 초연했을 때에도 그는 연주장에 오지 않았고, 마지막 작품 교향곡 4번이 스토코프스키에 의해 초연되었을 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나 지난 후였다.
<추천 음반>
*교향곡 2번, 어둠 속의 센트럴파크, 대답없는 질문 - 뉴욕 필/ 번스타인 - DG 429220
*현악 4중주 1,2번 - 에머슨 4중주단 - DG 435864
2. 에리히 코른골트 (Erich Korngold, 1897-1957,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태생의 작곡가이지만 1943년
미국에 귀화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 유명한 음악비평가의 아들로 태어난 콘골트는 보기 드문 천재중의 한사람이었다. 10세 되던 해 칸타타
<황금>을 작곡해서 말러에게 보여주었고, 이 천재에게 경악한 말러는 쳄린스키에게 교육을 주선했다. 1910년에는 그가 11세때 만든
발레음악 <눈인형>이 빈 궁정가극장에서 초연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해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번은 당대의 명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 유럽 순회연주의 레퍼토리로 삼을 정도였다. 1916년엔 그가 만든 두 개의 오페라 <폴리크라테스의 반지>와
<비올란타>가 뮌헨에서 상연되었다. 그의 명성은 20세때 작곡한 오페라 <죽음의 도시>가 1920년 쾰른과 함부르크에서
초연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1930년엔 빈 국립음악원에서 오페라를 강의했다. 그러나 나치에 의해 격하당한 그는 1934년에 막스 라인하르트를
좇아 미국 헐리우드로 가서 영화음악에 매달렸고 두 번의 오스카 상도 수상했다. 후기 낭만주의적 영감으로 풍부한 멜로디 라인을 선보이던 코른골트의
음악은 영화음악과 관계하면서 홀대받았으나 현대에 들어서 급격히 재조명되고 있다.
<추천 음반>
*바이올린 협주곡 - 샤함(바이올린), 런던 심포니/ 프레빈 DG 439886
*신포니에타 작품5
- BBC 필하모닉/ 바메르트 Chandos 9317
3. 조지 거슈인 (George Gershwin, 1898-1937, 미국)
거슈인의 부모는 1891년경에 미국으로 이주해온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다. 음악에 대해 소질이 없어 보이던 그였지만 12세때 피아노 한대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급격히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거슈인은 정규적인 음악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벌린이나 칸의 파퓰러 음악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서 파퓰러
음악출판사에 피아노 주자로 취직한 그는 이후 파퓰러 음악 작곡가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 시초가 된 곡은 <스와니>였으며 그 때
거슈인의 나이 21세였다. 1924년 화이트먼의 밴드를 위해 작곡한 <랩소디 인 블루>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면서 그의 이름은 미국
전역에 퍼졌다. 이어 뉴욕 교향악단의 지휘자였던 월터 담로슈의 위촉으로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F장조>가 호평을 받았고, 파리 여행의
인상을 음악으로 나타낸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이 인기를 더했다. 1931년엔 <그대를 위해 부르리>라는 뮤지컬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으며, 1934년엔 그의 대표적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더했다. 말년의 그는 헐리우드에서
영화음악에 주력했다. 그의 음악은 블루스와 래그타임 또는 유태음악에 이르는 요소들을 교묘히 채용하고, 이를 유럽의 고전음악 전통에 접목시킨데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추천 음반>
*파리의 아메리카인, 랩소디 인 블루 - 1) 뉴욕 필하모닉, 컬럼비아 심포니/ 번스타인 Sony
42611,
2) 컬럼비아 재즈밴드/ 틸슨 토마스 - Sony MK42240
*피아노 협주곡 F장조 - 프레빈(피아노), 피츠버그
심포니/ 프레빈 Philips 412611
*포기와 베스 - 화이트, 해이먼, 블랙웰, 런던 필/ 래틀 EMI 49568
4. 아론 코플랜드 (Aaron Copland, 1900-1990, 미국)
거슈인과 마찬가지로 코플랜드도 유태계 러시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 유학하여 퐁탱블루 음악원에서 배운 후, 당대 음악계의 가장 걸출한 스승이던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웠다.
프랑스에서 스트라빈스키와 프랑스 6인조 음악을 깊이 연구하고 1924년 미국으로 돌아온 코플랜드는 프랑스 시절에 배운 신고전주의 양식과 미국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융합하여 밝고 역동적인 음악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남미의 리듬과 미국의 재즈 음악, 민속음악 요소들을 발레음악에
도입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엘 살롱 멕시코> <빌리 더 키드> <로데오> <애팔레치아의 봄> 등의
주요 발레작품들이 모두 그러한 경향을 띄고 있다. 1930년대에 들면서 코플랜드는 재즈적인 이디엄을 버리고 쇤베르크 스타일의 12음 기법에
흥미를 가지면서 <피아노와 현을 위한 4중주곡>등을 발표했다. 그는 교향곡, 관현악곡, 발레음악에서 피아노곡, 오르간곡, 가곡,
민요편곡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작품을 선보였다. 이 중에는 '생쥐와 인간'을 비롯한 영화음악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추천 음반>
*애팔레치아의 봄 - 1) 런던 심포니/ 도라티 - Mercury 343012
*4개의 무곡
에피소드, 엘 살롱 멕시코 - 디트로이트 심포니/ 도라티 - DECCA 430705
5.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1918-1990, 미국)
작곡가였고, 지휘자였고, 피아니스트였으며,
교사와 방송진행자이기도 했던 만능의 음악가. 작곡가로서의 번스타인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품은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다. 1957년에 이 작품이 안무가 제롬 로빈스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발표되면서 번스타인은 일약 세계적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보했다. 마사추세츠의 로렌스에서 태어난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작곡을 배웠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케스트레이션, 지휘를 배웠다. 40대
초반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와 아르투르 로진츠키 아래서 부지휘자로 일했으며, 1943년 브루노 발터의 갑작스런 사정으로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일약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몰고 왔다. 1958년에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으로 지명되었고, 이 여세를 몰아 빈 필, 런던 필, 이스라엘 필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휘자로서의 번스타인은 엄청나게 폭넓은 레퍼토리를 보유했으며, 생동감과 열광적인 지휘 스타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작곡가로서는 재즈와 팝 음악을 종교음악, 성악, 발라드 장르와 혼융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추천 음반>
*캔디드 - 해이들리, 앤더슨, 런던 심포니/ 번스타인- DG 429734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
우드, 베이머, 차카리스, 존 그린 오케스트라 - Sony SK48211
● 헝가리 작곡가
1.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헝가리)
첼로 연주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6세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리스트는 8세에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1821년 10세의 나이로 빈으로 간 리스트는 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이듬해 12월에 첫
연주회를 가졌다. 리스트의 연주회는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몰고왔다. 1823년 4월에 가진 두번째 연주회에는 베토벤이 참석하여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는 일화도 남기도 있다. 1823년부터 35년까지 리스트는 파리를 무대로 활동했다. 파에르에게 작곡을, 라이하에게 대위법을 배우며
자신의 기량을 닦았다. 파리에서 그는 초절적인 기교로 살롱 사회의 인기를 휩쓸었다. 위고, 마스네, 상드, 하이네, 라마르틴같은 문화예술계의
거물들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에 만난 마리 다구 백작부인에게서 이후 세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
자신 또한 제자를 임신시키는 등의 스캔들로 고통받기도 했다. 백작부인과 헤어진 리스트는 유럽을 떠돌다가 비트겐슈타인 백작부인을 알게되어
1848년에 바이마르에 정착, <전주곡> <파우스트 심포니> <헝가리 랩소디>와 같은 걸작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이 이혼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수도원에 들어가버렸고, 리스트도 성직에 몸을 담아 말년을 종교음악 작곡과 교육에
바쳤다.
<추천 음반>
*피아노 협주곡 1,2번 - 1) 리흐테르(피아노), 런던 심포니/ 콘드라신 - Philips
446200,
2) 재니스(피아노), 모스크바 필,
모스트바 라디오 심포니/콘드라신, 로체스트벤스키 - Mercury 432002
*헝가리 랩소디 1-6번 - 런던 심포니/ 도라티 Mercury 432015
*파우스트 교향곡 - 시카고 심포니/ 솔티 -
Decca 417399
*피아노 소나타 B단조 - 데미덴코(피아노) - Hyperion 166616
2. 벨라 바르토크 (Bela Bartok, 1881-1945, 헝가리)
1881년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바르토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품에서 자란 병약한 소년이었다. 교사인 그의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고, 이
천재적인 소년은 9세부터 작곡을 시작하고, 11세에 공식적인 피아노 데뷔 무대를 가질 정도로 습득이 빨랐다. 1899년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진학한 바르토크는 쾨슬러에게 작곡을, 리스트의 제자인 토만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이 당시인 1902년에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의 작품세계에 몰두했다. 몇년후 시골에 살던 졸탄 코다이를 만나
의기투합한 그는 헝가리 시골을 돌며 전통음악의 채취에 힘을 썼다. 1907년엔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헝가리 민속음악의
어법을 용해시킨 작품들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백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작곡과 연주회를 그치지 않던 그는 1945년에
뉴욕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음악사에 남긴 바르토크의 족적은 특별한 것이었다. 선법적인 화성법과 자유로운 조성이 민속음악적 재료와
어울려 독특한 음악 언어를 창출해낸 것이었다. 많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6개의 <현악 4중주>와 3개의 <피아노
협주곡>, 발레음악 <이상한 만다린>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등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추천 음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 1) 시카고 심포니/ 라이너 - BMG GD60175,
2) 시카고
심포니/솔티 Decca 417754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 1)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라이너 - BMG 61504
,
2) 몬트리올 심포니/ 뒤투아 - Decca 421443
*피아노 협주곡 1,2,3번 - 1) 비숍-코바체비치(피아노),
BBC교향악단/데이비스 - Philips 438812,
2) 코치슈(피아노),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피셔 Philips
446366
*바이올린 협주곡 1,2번 - 1) 정경화(바이올린),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래틀 - EMI 54211,
2)
주커만(바이올린), 슬래트킨 - RCA 60749
*현악 4중주 1-6번- 1) 에머슨 4중주단 DG 423657,
2) 베그
4중주단 Auvidis E7717-9
3. 졸탄 코다이 (Zoltan Kodaly, 1882-1967, 헝가리)
체코의 근대음악에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가
있었다면, 헝가리의 근대음악엔 코다이와 바르토크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코다이는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웠다. 1905년에 교사 자격증을 따고 이듬해 벨라 바르토크를 만나 헝가리 민요 수집활동에 착수했다.
1906년 박사학위를 딴 후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드뷔시를 만나게 되었고 드뷔시의 음악세계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7년
부다페스트 음악원 교수로 취임해 음악이론을 가르쳤으며 이후엔 작곡도 가르치며 1940년까지 일했다. 오페라 <하리 야노슈>,
관현악곡 <갈란타 춤곡>, 교회음악 <미사 브레비스> 등의 대표작들을 들으면 코다이가 헝가리 민요들을 자유롭게 빌려
쓰면서도 바르토크와는 달리 서정적이며 단순한 음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남긴 헝가리 민속음악과 음악교육에 대한 저서는 현대
헝가리 음악교육의 지표가 되었다. 헝가리 예술원의 원장이었고, 국제 음악교육협회의 명예총재였으며, 국제 민속음악회의 회장이기도 했던 그는
1967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천 음반>
*하리 야노슈 모음곡, 갈란타 춤곡 - 런던 심포니/ 케르테즈 - Belart 461012
*무반주
첼로 모음곡 - 슈타커(첼로) - Delos 1015
4. 괴르기 리게티 (Gyorgy Ligeti, 1923-, 헝가리)
트란실바니아에서 유태계 헝가리 태생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945년부터 49년까지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수학한 후 1950년붜 부다페스트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56년 소련군이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자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서 나중에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다. 결국 리게티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와진 헝가리에서 태어나 호르타의
파시스트 정권과 독일 점령군이 압제를 견뎌내고, 10여년간 공산 정권 아래 살다가 빈에서 자유를 찾은 셈이다. 그의 대담무쌍한 곡들은 빈으로
이주한 후에야 비로소 악보로 출판될 수 있었다. 빈에서 그는 당시 유럽 음악계를 시끄럽게 만들던 아방가르드 음악가들과 만난다. 그들 중의
한사람인 헤르베르트 엘메르트는 리게티를 쾰른의 전자음악 스튜디오 에 초청했다. 리게티가 작곡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 것은 1950년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아파리시옹> <아트모스페레스>같은 대규모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음열주의
음악을 떠나 전자음악에 몰두했다. 그의 작업은 음 빛깔과 지속성, 음의 밀도와 음역 등 음이 가진 여러 속성을 탐험하는데 바쳐졌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음 재료들을 느리고 견고하지만 감각적인 언어로 표출해냄으로서 현대음악의 중요한 봉우리로 설 수 있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관현악곡
<론타노>(1967), 현악기를 위한 <라미피카시옹>(1969), <첼로협주곡>(1966), 3인의 독창자와
7개 악기를 위한 <아방튀르>(1963) <새로운 아방튀르>(1966)같은 곡을 들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아방튀르>는 평론가들에 의해 "상상적 무대에서 펼쳐지는 환상적 변환"이라고 묘사된 바 있다. 그의 오페라 <위대한
죽음>(1978) 역시 환상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추천 음반>
*<아트모스페레스>, 현악을 위한 <라미피카시옹> - 바덴바덴 라디오 오케스트라/
부어 - Wergo 60162
*첼로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 앙상블 앵테로 콩탕포랭/ 불레즈 DG 439808
*<새로운 아방튀르> <레퀴엠> - 다름슈타트 실내앙상블/ 마데르나 Wergo 60045
● 폴란드작곡가
1. 프레데리크 쇼팽 (Frederic Chopin, 1810-1849, 폴란드)
고뇌와 슬픔으로 얼룩진 낭만주의 작곡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 쇼팽은 181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인이었던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를 둔 탓에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두
가지 속성, 즉 향수와 동경의 색채가 같이 드러난다. 스물 여섯 살 때 열일곱 살의 폴란드 소녀와 약혼했으나 결핵으로 인해 결혼을 포기했다.
폴란드 시절에 이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리던 쇼팽은 1830년에 유럽 연주여행을 떠났고 이듬해 파리에 정착했다. 이 속에서 그는 리스트,
들라크로아, 하이네, 발자크같은 당대의 예술가, 문인들과 교류를 가졌는데, 이 중에는 여성 문학가로 유명하던 조르주
상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1836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후 10년에 걸쳐 열렬한 사랑을 이어갔다. 병약했던 쇼팽은 상드와 헤어진 후 더욱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3년후인 1949년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아노의 대가였던 만큼 그는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협주곡, 환상곡,
즉흥곡, 야상곡, 왈츠, 마주르카, 뱃노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해냈다. 특히 시적 감흥으로 가득찬 27개의 연습곡은 가장 유명한 쇼팽의
작품이다. 그러나 쇼팽이 음악사에서 제대로 대접받은 것은 죽은 지 꽤 지나서부터였다. 100년전만 해도 쇼팽은 아름답긴하나 비중은 없는 피아노
곡만 쓴 작곡가 정도로 여겨졌다.
<추천 음반>
*피아노 협주곡 1번 - 1) 아르헤리치(피아노), 런던 심포니/ 아바도 DG 415061,
2)
프랑수아(피아노), 몬테카를로 오페라 오케스트라/ 프레모 - EMI 47557
*피아노 소나타 2번 - 1) 폴리니- DG 415346,
2) 루빈슈타인 - BMG 89812
*발라드 1-4번 - 1) 침머만 - DG 423090,
2) 루빈슈타인 - BMG
89651
*연습곡 1-51번 - 1) 코르토 - Dante HPC-003,
2) 폴리니 - DG 413794
*전주곡
작품 28번 - 1) 아르헤리치 - DG 41836,
2) 레프 - Hyperion 66324
*마주르카 - 1) 미켈란젤리 -
DG413449,
2) 루빈슈타인 - BMG RD85171
*녹턴 - 1) 아라우 - Philips 416440,
2)
루빈슈타인 - BMG RD89563
*왈츠 - 1) 리파티- EMI 69802,
2) 루빈슈타인 - BMG RD89564
*폴로네이즈 - 1) 루빈슈타인 - BMG RD89814,
2) 데미덴코 - Hyperion 66597
2.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Witold Lutoslawski, 1913-1994,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고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루토스와프스키는 1938년 첫 작품으로 <교향적 변주곡>을 출판했다. 전쟁 중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바르샤바로 돌아온 그는 안제이 파눈프니크와 피아노 듀오를 결성하여 연주활동을 벌였다. 초기에는 음열주의에 이후엔 우연성 음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20세기 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한 유파에 속하길
거부했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의 활동도 겸했던 그는 1960년대 유럽 음악계를 움직인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이후엔 미국과 스웨덴 등
각지의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한 바 있다. 성숙기의 작품 중에서 <베네치아의 유희>(1961), 2번 교향곡(1967),
<오케스트라를 위한 책>(1968) <노벨레테>(1979)를 비롯하여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된
<첼로협주곡>(1970)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추천 음반>
*교향곡 1,2번 - 폴란드 방송교향악단/ 루토스와프스키 EMI 65076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바르소비필/ 로비츠키 - Philips 4266632
*첼로협주곡 - 로스트로포비치(첼로), 파리 오케스트라/ 루토스와프스키
EMI 49304
3.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 (Krzystof Penderecki, 1933-, 폴란드)
크라코프 음악원을 졸업하고 1972년부터 동
음악원 강사로 활동한 바 있는 펜데레츠키는 현대 폴란드 작곡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현악기의 새로운 효과를 보여주었고 타악기
음향의 다양함을 들려주었다. 또한 종래의 오선지식 기보법을 버리고 시각적인 형태의 새 기보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아나클라시스>(1960)를 발표할 때까진 고전적인 기보법을 따르고 있었지만 <폴리모르피아> <데 나투라
소노리스> 등에 이르면서 완전히 새로운 기보법을 사용하여 화제가 되었다. 여타의 아방가르드 작곡가와는 달리 그는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모았는데, 그러한 대표적인 곡으로 <성 누가 수난곡>을 들 수 있다. 로체스터 대학과 보르도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5년엔 런던 왕립음악원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60년에 초연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몰고왔던 곡인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를 비롯하여 종교음악 <마니피카트> <테 데움>, 오페라 <실락원> 등을 들 수
있다.
<추천 음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변용> - 에딘저(바이올린), 카토비츠 라디오 심포니/ 펜데레츠키 -
Thorofon 2017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 폴란드 방송교향악단/ 펜데레츠키 EMI 65077
*비올라 협주곡 - 카쉬카쉬언(비올라), 슈투트가르트 챔버 오케스트라/ 다비스 ECM 439611
● 체코 작곡가
1. 안토닌 드보르자크 (Antonin Dvorak, 1841-1904, 체코)
드보르자크는 푸주간 겸 여관업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을 이어받기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16세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졸업했다. 카렐 코므자크
악단의 비올라 주자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이 악단이 프라하 가극장 소속 오케스트라에 통합되고, 거기에 스메타나가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연주와
작곡생활을 본격적으로 병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찌기 바그너와 브람스가 매료된 바 있는 슬라브 특유의 민속적 요소에도 눈을 떴다. 자식들을 잃고
슬픔 속에서 작곡한 교회음악 <스타바트 마테르>, 브람스의 소개로 시작하게 된 <슬라브 무곡 1집> 등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드보르자크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작곡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891년엔 차이코프스키의 초대로 러시아를
방문했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지휘자로서도 명망을 얻은 그는 1891년에 뉴욕의 미국립음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1895년까지 일했다. 그 당시에 쓰여진 것이 그의 9번 교향곡 <신세계에서>와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같은 곡이었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프라하로 되돌아온 그는 1904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곡이 넘는 그의
작품들에선 체코 민속음악 형식이 가미된 이성주의와 후기 낭만주의의 표현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추천 음반>
*교향곡 8번 - 1) 런던 심포니/ 도라티 - Mercury 434312,
2) 런던 심포니/
데이비스 - Philips 438347
*교향곡 9번 - 1) 베를린 필/ 프리차이 - DG 423384,
2) 체코 필/ 노이만
- Denon - 75968
*첼로 협주곡 - 1) 로스트로포비치(첼로), 베를린 필/ 카라얀 DG 447413,
2)
푸르니에(첼로), 베를린 필/ 셸 - DG 423881
*바이올린 협주곡 - 1) 스턴(바이올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오먼디 -
Sony SMK66827,
2) 수크(바이올린),체코필/ 안체를 - Supraphone 1928
*슬라브 무곡 1-8번 - 1)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셀 - Sony SBK48161,
2)바바리안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쿠벨릭- DG 419056
*피아노 5중주 - 1) 리흐테르(피아노), 보로딘 4중주단 - Philips 412249,
2) 프레슬러(피아노), 에머슨
4중주단 DG -439868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 - 1) 스메타나 4중주단 - DENON C37-7338,
2) 이탈리아 4중주단 - Philips 420876
*피아노 3중주 4번 <둠키> - 1) 수크 3중주단 -
DENON CO 1410,
2) 보로딘 트리오 - Chandos 8445
*<스타바트 마테르> - 바바리안 라디오
오케스트라/ 쿠벨릭 DG 437938
2. 베드리히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1884, 체코)
비록 드보르자크와 야나체크같은 작곡가가 있지만,
연대나 영향력으로 볼 때 '체코 음악의 아버지'는 당연히 스메타나의 몫이다. 보헤미아 리토미즐에서 맥주 제조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 있었으며 그는 독일어를 쓰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가 체코어를 배운 것은 성년이 되어서였다. 11세 때 공부를
하기 위해 홀로 프라하로 떠났다. 거기서 베를리오즈나 슈만을 만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리스트를 만난 것이었다. 리스트는 후에 그의
작품 <6개의 성격적 소품>을 출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849년 리스트의 원조를 받아 프라하에 음악학교를 설립했지만 정치적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그는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1856년 스웨덴 고텐부르크 필하모닉 협회의 초청으로 그 곳의 지휘자 생활을 시작한 스메타나는
5년동안 머물면서 제 1번 교향시 등을 작곡했다. 1861년 체코의 민족운동이 다시 활발해지자 스메타나는 프라하로 돌아가 음악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작곡된 첫 오페라가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인>이었다. 이어 체코의 국가적인 오페라 <팔려간
신부>가 작곡되었고, 이 두 오페라가 상연된 1866년엔 새로 건설된 국민극장의 수석 지휘자 자리에 앉게 되었다. 1870년, 난청 증세로
인해 지휘자를 그만 둔 스메타나는 그 해 가을에 완전히 청각을 상실하게 되고 말았다. 원인은 매독으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모든 공직을 버리고
보헤미아 북부의 작은 마을로 들어가 은둔하던 스메타나는 3년 후에 다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했고 결국 188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오페라 이외에도 6곡으로 된 교향시 <나의 조국>은 스메타나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곡이다. 특히 이 곡의 제 2곡
<몰다우>는 유명하다. 그러나 체코가 그의 음악을 제대로 인정하게 된 것은 세상을 떠나서 한참 후였다.
<추천 음반>
*나의 조국 - 1) 체코 필/ 쿠벨릭 - Supraphon 1208,
2)베를린필/ 프리차이 -
DG 423384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에서> - 1) 알반 베르크 4중주단 - EMI 754215,
2)
스메타나 4중주단 - Denon 7339
3. 레오슈 야나체크 (Leos Janacek, 1854-1928, 체코)
스메타나, 드보르자크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3대 작곡가
중의 한사람이다. 모라비아 지방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국민학교 교사와 오르가니스트를 겸업하던 아버지의 열번째 아들로 태어난 야나체크는
음악교사가 되기 위해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프라하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한 후, 브루노의 음악교사겸 합창장으로 활동하다가 1881년부터 브루노
오르간 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했다. 이 당시 이미 꽤 많은 곡을 작곡해놓았지만 브루노 이외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탁월한 그의 오페라
<예누파>가 1904년에 브루노에서 초연되었지만 이 곡이 프라하 국민극장까지 진출하는 데는 12년이라는 세월이 걸려야 했다. 결국
그가 작곡가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60대 중반에 들어 체코가 독립하고 그 즈음하여 38세 연하의 유부녀를 짝사랑하게되면서 부터였다.
<카티아 코바노바>, <영리한 암여우 이야기> <마크로풀로스 사건>같은 오페라들과 <대장 불바>
<글라골 미사>같은 말년의 작품들이 결정적으로 그의 이름을 드러내주었다. 야나체크는 체코 민속음악, 특히 모라비아 민요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이것이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러시아 학파의 사실주의에 힘입어 독특한 서정성을 자아냈다.
<추천 음반>
*바이올린 협주곡 <영혼의 여행>, 신포니에타 - 수크(바이올린), 체코필/ 노이만 -
Supraphone 1107172
*현악 4중주 1,2번 - 브리튼 4중주단 - EMI 54787
*바이올린 소나타 -
루디(바이올린), 아모얄(피아노) - EMI 555585
*글라골리틱 미사 - 덴마크 라디오 심포니/ 메케라스 - Chandos 9310
<참조 Site>
- http://w3.rz-berlin.mpg.de/cmp/janacek.html
● 스페인 작곡가
1. 마누엘 데 화야 (Manuel De Falla, 1876-1946, 스페인)
스페인의 카디스에서 태어난 파야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을 피아노 부문 1등으로 졸업했다. 1905년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이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파야의 첫번째 오페라
<허무한 인생>이 대상을 수상했다. 비록 이 작품이 상연되지는 못했으나 스페인에서 파야의 지명도는 대단히 높아졌다. 1907년 파리로
유학길에 오른 파야는 거기서 뒤카, 드뷔시, 알베니스, 라벨 등과 친분을 나누었다. 이 당시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에선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음악전통과 프랑스 음악이 가진 양식적 특징을 같이 발견할 수 있다. 즉 인상파적인 색채와 리듬이 스페인 국민악파적 방향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악기 사용의 측면에선 간결하면서도 엄격한 모습을 보여준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발레계의 거물 디아길레프와 함께 런던에서 발표한 발레음악
<삼각모자>가 절찬을 받았지만 그해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상심한 마음으로 스페인으로 돌아와 그라나다에 정착했다. 그라나다에선
가르시아 로르카와 함께 플라멩코 음악의 부흥에 앞장섰다. 1939년 아르헨티나 스페인 문화원의 초청으로 건너가 연주회와 작곡을 계속했으나 계속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1946년 코르도바 근처의 알타그라시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야가 남긴 작품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으나 <사랑은
마술사> <삼각모자>같은 발레음악에서 가곡과 피아노곡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적 정취를 강렬하게 불러일으킨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 <스페인 정원의 밤>은 드뷔시의 <이베리아>나 라벨의 <스페인 광시곡>에 영향받은 작품으로 인상주의파
관현악곡의 정수를 들려준다.
<추천 음반>
*스페인 정원의 밤 - 데 라로차(피아노), 런던 필/ 데 부르고스 - Decca 430703
*발레음악 <삼각모자> - 몬트리올 심포니/ 뒤투아 - Decca 410008
2. 호아킨 로드리고 (Joaquin Rodrigo, 1901-, 스페인)
로드리고는 스페인의 발렌시아 지방에 위치한 사군토에서
태어났다. 3세때 악성디프테리아로 인해 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과 재능을 발휘하여 오늘날 가장 이름 높은 스페인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 발렌시아 음악원에서 로페스 차바리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는데, 이 당시인 1924년에 <후글라레스>를
발렌시아 오케스트라에 의해 무대에 올렸다. 1927년 파리 고등사범학교로 옮긴 그는 폴 뒤카에게 음악을 배웠고 같은 스페인 출신의 작곡가인
화야의 음악에 감동받았다.
1933년 터키의 피아니스트인 빅토리아 카피와 결혼한 그는 스페인으로 일단 귀국했다가 1934년, 다시
파리에서 음악학 등을 공부하였고, 스페인이 내전에 시달리던 당시엔 주로 독일에서 지냈다. 1939년에 귀국하여 마드리드에 정착한 그는 1940년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랑훼즈 협주곡>을 발표했다. 저음현의 지속적이고도 활발한 공명을 통해 아랑훼즈 왕궁 시적 정취를
독창적으로 들려준 이 곡으로 인해 로드리고의 명성은 급작스럽게 퍼져나갔다. 특히 2악장의 주제선율은 이후 파퓰러 음악이나 재즈를 비롯하여 각종
악기로 편곡 연주되었다. 그의 음악세계는 화야처럼 스페인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스페인의 색채를 신고전주의적인
양식으로 소화시켰다.
특히 협주곡에 있어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기타 협주곡으로 '아랑훼즈' 이외에 <어느 신사를 위한
환상곡>(1954)과 4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1967)이 유명하다. 스페인 정부가 수여한 수많은 훈장은
물론이거니와 프랑스도 레종 도뇌르를 비롯한 최고의 훈장을 로드리고에게 수여했다.
<추천 음반>
*아랑훼즈 협주곡 - 1) 앙헬 로메로(기타), 런던 심포니/ 프레빈 - EMI 747694,
2)
보넬(기타), 몬트리올 심포니/ 뒤투아
Decca 430703
*어느 신사를 위한 환상곡 - 1) 앙헬 로메로(기타), 런던
심포니/ 프레빈 - EMI 747694,
2) 브림(기타), RCA 챔버 오케스트라/ 브로우어 BMG 61611
● 노르웨이 작곡가
1.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5세때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다. 1867년엔 노르웨이 음악협회를 발족하여 지휘자를 겸했다. 또한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 <서정 모음곡>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추천 음반>
*홀베르크 모음곡 - 1) 고텐부르크 심포니/ 예르비 - DG 437520,
2) 베를린 필/
카라얀 - DG 439010
*<페르귄트> 모음곡 1,2번 - 1) 고텐부르크 심포니/ 예르비 DG 427807,
2)
뉴욕필/ 번스타인 - Sony SMK47549
*피아노 협주곡 A단조 - 1) 리파티(피아노), 필하모니아/ 갈리에라 - EMI
63497,
2) 머스토넨(피아노),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블롬슈테트 Decca 44418
*서정소곡집 - 안즈네스(피아노) -
Virgin 59300
● 스위스 작곡가
1. 아르튀르 오네게르 (Arthur honegger, 1892-1955, 스위스)
상인의 집안에서 자란 오네게르는 독학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그러나 9세되던 해에 구노의 <파우스트>에 영감을 받아 두 개의 오페라를 작곡했을 정도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13세에 이르러선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트리오 등을 작곡해냈다. 마침내 취리히 음악원에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과 화음에 대해 공부하고 파리
국립음악원으로 옮겨 카페에게 바이올린을, 댕디에게 지휘법을, 비도르에게 작곡을 배웠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풀랑, 미요, 뒤레, 타유페르,
오릭과 함께 당대 프랑스의 가장 진보적인 음악그룹인 <프랑스 6인조>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1921년에 작곡한 관현악곡
<승리의 오라스>, 오라토리오 <다윗왕>과 1923년에 발표한 <퍼시픽 231>로 인해 그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발표한 오페라 <유디트>(1926), 발레음악 <세미라미스>(1934), 오라토리오
<화형대 위의 잔다르크>(1938), 부수음악 <죽음의 춤>(1940) 등이 그의 명성을 더해주었다. 또한 그는 5개의
교향곡과 <크리스마스 칸타타>같은 종교음악에서도 호평을 얻었으며 <레 미제라블> <죄와 벌>같은 영화음악에서도
실력을 발휘했다.
<추천 음반>
*교향곡 2번 - 보스턴 심포니/ 뮌슈 - BMG GD60685
*<다비드 왕> -
뒤투아 - Erato 45800
*<잔다르크> - 체코필/ 보도 - Supraphone
● 핀란드 작곡가
1. 얀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1865-1957, 핀란드)
5세 때부터 음악기초를 배우기 시작하여 11세 때 첫
작곡을 했던 시벨리우스는 20세에 헬싱키 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률보다 음악에 더 치중하는 바람에 법대에서 퇴학당하고 음악원으로
옮겼다. 애초 바이올리니스트를 지망했지만 교내 콩쿠르에서 낙선하면서 작곡으로 길을 정했다. 그곳에 새로 부임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부조니에게 자극을 받은 그는 졸업 후 베를린과 빈에서 공부했다. 1891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가 된 그는 이듬해엔
핀란드의 국민적 서사시인 <칼레발라>에 바탕을 둔 교향시 <쿨레르보 교향곡>을 작곡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이
핀란드의 명지휘자 카야누스의 눈에 뜨여 그의 위촉으로 <전설>을 작곡했다. 1897년부터 그는 핀란드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게
되었고, 2년 후엔 제 1번 교향곡을 작곡, 계속해서 7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당시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속국 상태에 놓여있었다. 애국심이
강한 시벨리우스는 1917년 핀란드의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민족적 지도자로서 그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이던 그는
1929년부터 작곡을 중단하고공백 세월을 보내다가 92세의 나이로 생에를 마쳤다. 실내악과 피아노 작품도 많이 썼지만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는
역시 그의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투오넬라의 백조> <핀란디아> <레민케이넨> 같은 교향시들이다.
<추천 음반>
*바이올린 협주곡 - 1)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USSR 방송교향악단/ 로체스트벤스키 - Mobile
Fidelity 899,
2) 하이페츠(바이올린), 런던 필/ 비첨 - EMI 64030
*교향시 <핀란디아>,
카렐리아 모음곡, 투오넬라의 백조 - 1) 베를린필/ 카라얀 - EMI 64333,
2) 아틀랜타 심포니/ 레비- Telarc 80320
*4개의 전설 - 1)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오먼디 - EMI 65176,
2) 고텐부르크 심포니/ 예르비 - Bis 294
*교향곡 1번, 2번 - 1) 오슬로 필/ 얀손스 EMI 542732, 54804,
2) 런던 심포니/ 카야누스 - Koch
37133
*교향곡 5번 - 1) 빈필/ 번스타인 - DG 427647,
2) 필하모니아/ 래틀 EMI 64737
● 브라질 작곡가
1. 에이토르 빌라-로보스 (Heitor Villa-Lobos, 1887-1959, 브라질)
브라질이 낳은 가장 유명한 작곡가
빌라-로보스는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아마추어 음악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서 집을 나간
그는 유랑 극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와 작곡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의 음악은 그런 식의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18세 때엔 마치 바르토크나
야나체크 등이 그랬던 것처럼 브라질의 오지로 들어가 민족음악을 연구했다. 1923년 36세의 나이로 파리에 가서 7년동안 유학생활을 보냈다. 그
기간동안 세고비아를 비롯한 지도적 음악가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창작활동을 엮어갔다. 기존의 작품들과 판연히 다른 그의 작품은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30년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지휘자, 교육자로 일하면서 자신의 작품과 유럽의 음악들을 소개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뉴욕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등 국내외 각종 문화단체와 학계에서 보내온 영예를 누렸으며, 1945년엔 브라질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대표를 역임했다.
그의 음악은 브라질의 민속음악과 유럽음악이 잘 혼융되어 있다. 특히 9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브라질풍의 바흐>(1930-1944)는
전세계가 애청하는 그의 대표곡이다.
<추천 음반>
*브라질 풍의 바흐 1,2,5,9번 - 1) 데 로스앙헬레스, 프랑스 국립교향악단/ 빌라-로보스 - EMI
61015,
2) 비두 사야오,빌라-로보스 (5번만 수록) - Sony MHK62355
*기타 협주곡 - 브림(기타),
런던심포니/ 프레빈 BMG 61604
● 한국 작곡가
1. 윤이상 (I-Sang, Yun, 1917-1995, 한국)
1917년 9월 17일, 윤이상은 경상남도 통영(지금의 충무)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독일의 문학가 루이제 린저는 선생의 태몽 이야기를 듣고 그의 자서전 제목을 '상처입은 용'이라고 달았으며, 이 제목은 윤이상을
상징하는 별명이 되었다. 8세 때 소학교에 입학하여 서양음계를 배운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서울에서 음악을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전쟁으로 인해 귀국한 그는 비밀 탄약 공장을 차리던 중에 조선어 가곡을 지었다는 이유로 2개월간의 고문과
투옥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회복한 그는 서울로 옮겨 음악활동을 계속했고 1955년에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했고, 1957년에 베를린으로 옮긴
윤이상은 블라허 등에게서 현대음악을 배웠다.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등 그의 작품은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1966년엔 도나우에싱엔에서 관현악을 위한 >예악>을 초연했다. 그러나 67년 6월 18일, 그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간첩으로 몰렸고 사형을 구형받았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었다. 베를린 시장을 비롯하여 카라얀, 클렘페러, 아라우를
위시하여 슈톡하우젠, 리게티, 헨체 등 당대 세계 정상 음악가들의 항의로 인해 죽음 직전에 구출된 그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으나 이후 평생토록
조국을 밟을 수 없이 '20세기의 오디세이'로 떠돌아야 했다. 69년엔 그가 감옥에서 작곡한 이중 오페라 <꿈>(<류퉁의
꿈>과 <나비의 미망인>)이 초연되었고, 72년 뮌헨 올림픽 문화축제에선 그의 오페라 '심청'이 올랐고, 베를린 대학 교수,
튀빙겐 대학 명예박사, 그리고 독일 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이 그에게 수여되었고, 사형수 윤이상은 현존 세계 5대 작곡가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다.
1981년엔 <광주여 영원하라>를 초연했고, 81년부터 87년까지 매년 1곡씩 교향곡을 발표했다. 1990년에 평양에서 '범민족 통일
음악회'를 성사시켰으나 그로 인해 건강을 해쳐 결국 95년에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까지 독주곡에서 오페라에 이르는 120여곡의 대작들을
작곡해냈으며, 그가 타계한 직후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은 "음양(陰陽), 동정(動靜), 강약(强弱)의 조화와 변화를 담아
동서양의 접목을 시도한 위대한 작곡가"라고 평했다. 또한 정치적 인본주의를 표방한 휴머니스트라고 말했다.
<추천 음반>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 - 니콜레, 홀리거, 슈니베르거, 데멘가 - Camerata 25CM236
*클라리넷 협주곡,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 - 브룬너,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 토마스 - Camerata 32CM 46
*
클라리넷 5중주 - 마이어, 빈 6중주단 - EMI 54304
*첼로 협주곡 - 팔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첸더 - Camerata
32CM237
*교향곡 5번 - 비트고스체 시립교향악단/ 우키가야 - CPO 99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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